칠천량 해전공원 조성 관련, 거제의 역사를 왜곡하는 경남도에 편승 아쉬움

거제시는 22일까지 열리는 거제시의회 125회 임시회에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계획안에 대해 의회 승인을 요청했고 의회 산업건설위원회는 '원안 가결'로 본회의에 회부해 22일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거제시는 경남발전연구원이 수행한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을 위한 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 용역결과에 따라 하청면 칠천도 연구리 옥계마을 산 84-1번지 일원 12,000㎡에 77억2천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전시관 및 추모공원 등을 오는 2010년까지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 칠천량 해전공원은 하청면 칠천도 어온리 물안 마을 인근이 아닌 하청면 칠천도 연구리 옥계마을 입구에 건립된다.
칠천량 해전공원의 목적은 "임진왜란 중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의 역사적 의미의 재조명을 통해 전몰자의 넋을 기리고, 역사의 소중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은 공원 조성에 앞서 몇가지 선행되어야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어 아쉬움을 던져준다.

첫번째,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부지 위치가 적정한 지 문제이다. 패전의 아픈 역사를 후대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는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곳에 해전공원이 건립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경남발전연구원이 수행한 '칠천량 해전공원' 용역보고서에 '칠천도 어온리 물안마을과 맞은편의 (장목면) 송진포, (하청면) 실전 사이의 해협은 칠천량 해전이 벌어진 곳'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 경남발전연구원이 수행한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을 위한 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에 칠천량 해전이 벌어진 곳은 칠천도 어온리 물안마을 인근이라고 밝혀놓았다.
또한 칠천량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이순신 장군이 1592년 6월 14일 임금에게 올린 '이도당항포등4처승첩계본'(二度唐項浦四處勝捷啓本)이다.

이 계본에 '도거제지온천량송진포경야'(到巨濟地溫川梁松津浦經夜)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1592년 6월 7일 벌어진 장목면 율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거제에 도착하여 온천량이 있는 송진포에서 밤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 이순신 장군 승첩계본에 칠천량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여기서 말하는 온천량은 칠천량의 옛 지명이며, 송진포는 칠천도 맞은편에 있는 장목면 송진포를 말한다. 현재의 칠천도(七川島)의 지명유래는 난중잡록과 원균행상기에는 온라도(溫羅島)로, 난중일기에는 온천도(溫川島), 칠천도(漆川島), 칠천량(漆川梁), 칠내도(漆乃島) 등으로 불리었다.

어온리(於溫里) 또한 온천이 있다는 '재온(在溫)'의 의미를 담고 있어, 칠천량의 위치는 하청면 칠천도 어온리 물안마을 앞 해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용역보고서에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부지의 기본 요건은 '칠천량 해전과의 역사적 관련성, 상징성이 풍부한 곳'이라고 밝혀놓았음에도 칠천량 해전이 벌어진 하청면 칠천도 어온리 물안마을 인근이 아닌 하청면 칠천도 연구리 옥계마을 입구를 사업대상지로 선정했다.
▲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을 위한 타당성조사 및 기본계획에 밝혀놓은 칠천량 해전공원 대상부지 기본요건
용역보고서에 칠천도 연구리 옥계마을로 결정한 이유를 '역사적 관련성을 모두 포함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용역보고서에 밝히고 있는 단 하나의 역사적 관련성은 '(현재 경상남도가 이순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벌이고 있는) 거북선 찾기 사업의 거북선 탐사지역이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 관련성이 어느 지역보다 높은 칠천도 어온리 물안마을 지역을 용역보고서에 '역사적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난도질 해놓았다.

경상남도가 3,5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추진하는 '이순신 프로젝트'가 이순신 장군과 선조들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치적 프로젝트'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칠천량 해전공원을 조성하면서 두번째 잊고 있는 내용은 칠천도와 인근 지역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재인식이 절대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칠천량 해전공원이 조성될 경우 칠천도를 단순히 원균이 대패한 역사현장으로만 인식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이다.

칠천도와 칠천도 인근 지역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5월부터 1594년 10월 장문포해전(장목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을 거둔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견내량해전(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웅포해전, 당항포해전,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해전, 제2차 장문포해전 등의 전초기지였다는 사실(史實)은 역사에 생생히 살아있다.

1592년부터 1594년까지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 기록인 난중일기와 역사 기록에 칠천도와 그 인근 지역의 지명이 부지기수로 거명되고 있다.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 1592년 5월 7일 옥포만에서 왜선 26척을 무찌른 후 '영등포(장목면 구영) 앞바다로 물러 나와 군사들에 나무를 하고 물도 긷게 하여 밤을 지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 6월 7일 정오쯤에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적선이 율포(장목면 대금)에 있다는 말을 듣고 ▲ 6월 7일 '초저녁에 거제 온천량(칠천량) 송진포에 도착하여 밤을 지냈다.' '송진포로 다시 돌아왔다.'

▲ 1592년 7월 8일의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안골포 해전 치르기 전인 7월 9일 '거제 온천도(칠천도)에서 밤을 지냈다.'

▲ 8월 26일 '저녁에 배를 옮겨 타고는 거제 각호사(가조도) 앞바다에 이르러 잤다. 27일 '거제 칠내도(칠천도)에 이르자'

▲ 1593년 2월 8일, '초저녁에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 2월 10일 '밤 10시경에 영등포 뒤의 소진포(장목면 송진포)로 돌아와 배를 대고 밤을 지냈다.' 11일, '군사들을 쉬게 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 12일, '초저녁에 칠천도에 다달았는데, 세찬 빗줄기가 그치지 않았다.'

▲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세찬 바람으로 칠천도에 그대로 머물렀다. ▲ 18일 '어둠을 틈타 영등포 뒷바다로 돌아왔다. 사화랑(장목면 황포)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 19일 '서풍이 세게 불어서 배를 띄우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출항하지 않았다.' ▲ 20일 '해가 질 무렵 소진포에 이르러서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 22일 '사화랑(황포)에 이르러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중략) 돛을 달고 소진포에 돌아와서 묵었다.' ▲ 24일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빗발이 세게 몰아쳤다. 도저히 바로 나아갈 수 없어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 25일 '바람의 흐름이 순조롭지 못해 그냥 칠천량에 머물렀다.' 26일 '하루 내내 머물렀다.' 28일, '사화랑에서 묵었다.' 29일,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 3월 5일, '칠천량에서 묵었다' 3월 21일, '새벽에 배를 띄워 거제 유자도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22일, '오후에 칠천량으로 옮겨 배를 대었다.' 24일,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7월 4일 오후 2시경 영등포 앞바다에서, 7월 9일 '거제 온천도(칠천도)에서 밤을 지냈다.' 등이 역사기록이다.

3,500억원을 들여 경상남도가 추진하는 이순신 프로젝트가 제대로 역사적 방향을 잡아 가고 있다면 칠천도와 인근 지역은 응당 이순신 프로젝트의 '화룡점정' 지역이 돼야 한다.

칠천도를 중심으로 장문포해전(장목), 영등포해전(장목면 구영), 율포해전(장목면 율포)을 비롯하여, 송진포 등에 묻혀있는 역사를 온전히 복원시키면 칠천량 해전공원보다 몇 십배의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 역사의 산교육장이 될 것이다.

칠천량 해전공원은 '거북선 찾기사업의 거북선 탐사지역'에 부수되는 사업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건설될 이순신대교와 연관성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경상남도는 마산 구산면과 장목면 구영리 황포마을을 잇는 이순신대교 건설을 추진하고 있어 이순신 대교가 거가대교와 같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낼 경우 거제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관광 명소가 될 것이다.

칠천도 어온리 물안마을은 앞으로 건설될 이순신대교를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지만, 칠천도 연구리 옥계마을은 이순신대교의 반대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패배의 역사가 담겨있는 칠천량해전공원에서 이순신대교를 바라볼 때의 교육 효과는 '승리와 패배'의 살아있는 생생한 교육장이 될 것이다.

거제시의 주인은 거제시민이다. 옥포대첩에 85척의 함선으로 승리를 일궈냈다고 기록돼 있지만, 그 중 46척은 어선(포작선)이었다는 사실은 이순신 장군 못지 않게 거제를 지킨 선조들은 힘없는 백성이었다.

거제시와 거제시의회 의원들이 선조들의 빛나는 역사를 되살리는 역할은 하지 못할망정 '소중한 역사찾기'의 방해꾼이 되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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