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원 인성회복국민운동본부 김창환 사무총장

겸손은 예로부터 심신 수양과 대인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중요시해왔다.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낮추는 것, 무조건 자신을 깎아 내리거나 모자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에 기반을 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존중하는 마음에서 겸손이 자라고, 겸손에서 예의와 질서가 생기며, 예의와 질서를 통해 공동체가 유지된다. 겸손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 토대가 되는 것이다.

육군에서 외국군 위탁교육생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과정을 실시했을 때 참가한 교육생이 ‘한국에서의 문화 충격’을 주제로 발표를 했다. “한국어는 경어와 겸양어가 있어 어려웠다”며 나이 어린 한국 장교들에게 ‘진지 드셨어요?’,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했다가 웃음을 산 적이 여러 번 있다“고 한다. 이러한 언어의 차이는 서양과 달리 생활 속 언어에서부터 자연스레 베어 나오는 겸손의 깊이를 만든 한민족의 핵심철학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는 아버지를 소개할 때 ‘내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 우리가 영어나 서양의 언어를 배울 때도 이해하기 어려운 게 언어적으로 미국은 항상 ‘my father'라고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잘 살아야 돼‘라고 해야지 ’내가 잘 살아야 돼‘하면 문제가 된다. ’우리‘라는 굳건한 공동체 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우리 민족의 공동체 의식은 국채보상운동이나 IMF 금 모으기, 태안기름유출 사건으로 발휘되었고 대한민국의 저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 민족에게는 ‘다스림’마저도 소수가 다수를 누르고 통제하고 몰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스림’이란 ‘다-살림’으로 겸손함을 가진 소수가 모두를 살리기 위한 ‘지혜로운 배려’와 ‘존중’으로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리더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상생과 조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우리’라는 가치가 살아있는 공동체 의식, 이기심이 아닌 공심을 선택하게 하는 교육, 두루 이롭게 하는 정치, 더불어 살아가는 경제로 공심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오천년 한민족의 철학이다. 이 철학이 ‘홍익인간 재세이화(弘益人間 在世理化)’라는 단군의 건국이념이다.

단군시대에 이어 삼국시대에는 그 범위가 넓어지고 제천행사를 통해 두레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하였고, 조선시대에는 향약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의 자치 규약과 공동체 조직으로 구체화 됐으며, 서원과 함께 향촌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홍익은 두레 정신, 품앗이 문화, 상부상조의 생활화 등 화합과 상생의 공동체 문화를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겸손은 우리 역사에서 한국(桓國)시대부터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태백일사 한국본기 중에 오훈(五訓)이 있는데, 오훈의 다섯 번째 항목이 ‘겸화불투(謙和不鬪)‘라 겸손하고 화복하여 싸우지 아니한다고 이르고 있다. 한국에 이어 배달국(倍達國)시대에는 나라의 체계를 바로 세우는 중심가치, 삼륜구서(三輪九誓) 중 구서의 다섯 번째 항목이 ’손우군(遜于群)’으로 무리에게는 겸손하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중심가치였던 사단칠정(四端七情) 중 사단의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신(信)을 더하여 오상(五常)이라 한다.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을 백성에게 알리고 교육시키기 위해 한양의 4대문(大門)의 이름에 대입시켰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그리고 중앙에는 보신각(普信閣)으로 이름 지었다.

공자께서 군자들이 살고 있는 구이(九夷구이는 동이東夷, 곧 우리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논어 자한편에 나오고, 공자의 7대손 공빈이 기록한 ‘동이열전’에서 ‘그 나라는 크지만 교만하지 않고 그 병사는 강하나 침략하지 않는다. 풍속이 순후하여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먹는 자는 밥을 미루고 남녀는 따로 거처하니 가히 동방예의(禮儀)의 군자국(君子國)이라 하겠다’고 전한다.

단군의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사람 안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들어있다’는 조화와 상생의 천지인(天地人)사상을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생활철학으로 구체화 한 것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리라’라는 단군의 뜻은 단순한 통치이념이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한민족이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 “이렇게 한 번 살아보자. 다같이 이런 나라를 한 번 만들어 보자“며 품었던 민족의 첫 마음. 우리 선조들이 공동체와 국가, 그리고 개인의 삶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했던 염원과 이상,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대답,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삶의 가치와 존재 이유가 바로 홍익이었다.

‘누구나 태양과 같이 밝은 본성을 지니고 있어 사람 안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녹아 있다. 본심본태양앙명 인중천지일(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이라는 문구가 최치원 선생이 한자로 번역한 천부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태양처럼 밝은 본성, 신성, 얼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사람이 본성을 깨달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되고, 본성의 이치에 따라 세상을 두루 이롭게 하며 얼을 키우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두었다. 그리하여 어린이는 얼이 어리기 시작한 상태, 얼이 덜 성장한 사람을 말하고, 어른은 얼이 큰 사람, 어르신은 얼이 커서 신과 같은 사람을 뜻한다. 이는 육체가 나이 들어 그냥 늙은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 성장하는 존재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런 문화 속에 자연스레 어린이는 어른과 어르신을 공경하고 겸손한 예를 갖추어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얼을 키우는 예법이자 수행법으로 절 문화가 있다. 절은 ’제 얼‘의 준말로 자기를 낮추어 겸손한 마음으로 얼을 찾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절은 나를 대단한 것인 양 내세우고 높이는 아상(我想)을 버리게 하고 마음의 겸양(謙讓)을 갖추어 하심下心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절은 사람의 가장 겸손한 마음을 담은 아름다운 행동이라 여겨지고 있다.

절은 하늘에 올리는 것이나 땅에 올리는 것이나 조상이나 어르신에게 하는 것이나 모두 같은 것이다. 그 안에 존재하는 모두의 뿌리인 하늘 앞에 존중과 겸손을 표하는 것이다. 진정한 겸손은 나와 상대에 대한 깊은 존중에서 비롯되기에 나도 남도 가장 신성한 존재로 인정하는 민족의 철학은 겸손의 문화를 꽃 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주변국의 수 많은 역사왜곡과 분별없이 받아들인 많은 외래문화 속에서 아름다운 ‘우리’라는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게 되었고, 성공 중심의 무한 경쟁 속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며 겸손과 배려의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나만 행복하려고 하는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물질문명의 한계에서 새로운 정신문명의 시대를 열어가는 열쇠는 조화와 상생의 공동체 의식, 반만년 한민족의 홍익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홍익은 진정한 겸손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고,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거제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