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뒤흔든 '문재인의 힘'…하청면 유계출신 권철현 주일대사도 거론

노무현 추모 열풍이 조금씩 식는 것일까?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만은 ‘반이명박’ ‘반한나라당’ 정서가 뜨겁지 않았다. <시사N>이 내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실시하는 ‘미리 보는 2010 지방선거’ 여론조사를 위해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부산∙경남(PK) 지역이었다. 조사를 한 곳이 노 전 대통령이 정치적 기반으로 했던, 그래서 추모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PK 지역이었는데도 친노 후보가 현직 광역단체장을 이기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서울 조사에서는 유시민∙한명숙 등 친노 후보가 현 오세훈 서울시장을 이기는 결과가 나왔지만 PK지역에서는 문재인 등 친노 후보가 현직인 허남식 부산시장(33.3% 대 39.3%)과 김태호 경남지사(26.75 대 41.5%)에게 지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주목해볼 부분도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나라당 후보로 권철현 주일대사나 서병수 의원이 나올 경우 이긴다는 결과가 나왔다. 문 전 비서실장이 출마 의사를 밝히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결과가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내년 지방선거와 관련해 한나라당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친노 정치인이 후보로 나오는 것이다. 지방선거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1주기 10일 뒤에 치러지기 때문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을 끝까지 옆에서 보좌했던 문재인 전 비서실장의 출마 여부에 관심이 모아진다. 그가 출마할 경우 정치적 구심 역할을 해서 진보∙개혁 세력이 결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은커녕 목소리도조차 떨리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하던 지난 5월23일의 기자회견.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양산 부산대병원에서 건조한 목소리로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사인은 자살이며, 가족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겼다고 브리핑했다. 그게 다였다.

한명숙 전 총리가 애절한 추도사로, 유시민 전 장관이 눈물 젖은 추도문으로 민심을 달랬다면,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렸던 문재인 전 실장은 슬픔을 드러내지 않은 채 흐트러짐 없는 묵묵한 모습으로 중심을 잡았다.

사이가 좋을리 없는 유족과 정부 간 가교 노릇도 도맡았다. 성난 조문객에게 떠밀려 문상을 못한 현 정부쪽 인사를 찾아가 사과하는 것도 늘 그의 몫이었다. 장례기간 내내 그저 조용히, 그가 있겠다 싶은 자리에 있었다.

◆ “싸나이’에 약한 지역 정서에 제대로 먹혔다”

그래서 더, 반항은 컸다. <시사IN>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공동으로 실시한 2010년 부산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지역의 터줏대감 한나라당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보였다.

박지원∙이용섭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이 “문재인 전 비서실장이 부산시장에 출마했으면 한다”라며 바람을 잡은 것도, 이런 지역 정서를 의식해서다.

민주당으로서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부산에 돌연 등장한 ‘말이 되는 카드’라는 얘기다. “부산이라는 동네가 ‘싸나이’에 약하다. 장례기간에 문 전 실장이 묵묵히 보여준 ‘의리’가 지역 정서에 제대로 먹힌 것 같다.” 한 지역 언론 기자는 ‘문재인의 부상’을 이렇게 해석했다.

정당 지지도만 보면, 부산에서 ‘서거 정국’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전체 응답자 중 45.3%가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고 답해, 22.3%의 지지를 얻는 데 그친 민주당을 2배 넘게 따돌렸다. 한때 부산∙경남 지역에서마저 지지율 역전 경보가 울렸던 것이 무색해질 만큼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그 뒤를 이어 친박연대가 7.0%, 민주노동당이 6.2%, 진보신당 2.4%,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이 나란히 2.1%를 기록했다. 모름/무응답은 12.6%였다.

하지만 당별로 ‘선수’들을 내세워 가상 대결을 시켜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문재인 효과’가 뚜렷하다. <시사N>은 허남식 현 부산시장을 포함한 한나라당 유력 후보 세 명과, 민주당 계열 유력 후보 두 명, 진보신당의 김석준 부산대 교수를 후보군으로 해서 여섯 차례 가상 대결을 실시했다. 진보신당 김석준 후보를 고정한 가운데, 한나라당에서는 허남식 부산시장, 서병수 의원(부산 해운대기장갑), 권철현 주일대사를, 민주당 계열에서는 문재인 전 비서실장과 조경태 의원(부산 사하을)을 내세웠다

한나라당 내 계파 구도에서 허남식 시장은 중립 성향, 서병수 의원은 박근혜계, 권철현 대사는 이상득계로 분류된다. 부산시장을 노리는 한나라당 각 계파의 ‘대표주자’들이다. 민주당 조경태 의원은 민주당의 유일한 부산 지역 현역 의원이다. 사하을에서 재선을 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그와 무관하게 서거 정국을 거치면서 ‘정치적 체급’이 급격히 올랐다. 진보신당 김석준 교수는 분당 이전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부산시장 선거에 2002∙2006년 연속 출마했다. 2002년 선거에서는 16.6%라는 만만찮은 득표력을 보여줬다.

가상 대결 결과, 범야권 후보로 나오는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한나라당 세 후보와의 대결에서 2승1패를 기록했다. 현직인 허남식 시장과의 대결에서만 6% 포인트 밀렸을 뿐, 권철현 대사를 2.7% 포인트, 서병수 의원을 7.9% 포인트 차로 따돌렸다. 부산에서 하나라당과 민주당의 정당 지지율이 2배 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눈에 띄는 선전이다. 진보신당 김석준 후보가 크게 보아 진보∙개혁 성향의 표라고 할 수 있는 10% 안팎의 지지를 가져가는 와중에 거둔 성적이다.

▲ 여야 부산시장 후보군. 맨 왼쪽부터 허남식 부산시장, 권철현 주일대사, 서병수 의원(이상 한나라당),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경태 의원(이상 범야권).

◆ 40~50대, 문재인에게 꽂혔다

문 전 실장은 특히, 범야권의 열세가 시작되는 연령대로 간주되어온 40대에서 오히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중∙장년층에서 부는 ‘문재인 바람’을 실감케 하는 결과다. 40대 응답자 중, 허 시장 과의 대결에서 47.9(허남식 30.7%), 권 대사와의 대결에서 50.8%(권철현 23.3%), 서 의원과의 대결에서 52.4%(서병수 24.1%)가 문 전 실장의 손을 들어줬다. 문 전 실장은 세 번의 대결에서 모두 40대에게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다. 문 전 실장은 50대 지지율에서도 각각 28.8%(대 허남식), 37.5%(대 권철현), 36.4%(대 서병수)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섣불리 나서지 않고 묵묵하게,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공적인 자리에서도 철저하게 슬픔을 삭이며, 정적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등 특유의 ‘문재인 코드’가 중장년층에게 큰 공감을 샀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한나라당 계열 인물이 ‘영남권’‘장년층’을 상대로 이 정도의 지지를 얻은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지난 6월2일 <시사IN>과 리얼미터가 진행했던 서울시장 여론조사(제91호)에서조차, 범야권 후보가 40대에서 얻은 최대 지지율은 한명숙 후보의 38.4%였다(상대인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는 37.3%). 서거정국이 결정일 때, 범야권 지지세가 부산에 비해 높은 서울에서 치러진 여권조사조차 ‘40대’는 여야 지지율의 역전이 일어나는 구분선이었다. 문 전 실장은 그 구분선을 50대로 훌쩍 밀어올렸다.

반면 영남권 의원이면서도 친노 직계와는 거리가 있던 조경태 의원은 세 차례 가상 대결에서 한나라당 후보에게 최소 8.2~최대23.3%포인트까지 뒤졌다. 조의원이 의원직을 내던지고 출마를 감행하기는 쉽지 않은 격차다. 민주당 후보로 조 의원을 상정한 가상대결에서도 진보신당 김석준 후보가 최대 21.5%까지 지지를 얻는 등 선전했다.

◆ 한나라당 부산시장 후보는 친박계 손에?

비록 ‘문재인 바람’이 심상치 않지만, 한나라당의 관심은 그래도 본선보다는 경선에 가 있다. 서거 정국이 끝나면 문재인 바람도 가라앉을 것으로 기대하는 데다, 결정적으로 문 전 실장 자신이 선거에 나서지 않으리라 예측하기 때문이다. 2006년 지자체 선거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요청마저 거절할 정도로, 문 전 실장은 정치에 뜻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여전히 시장이 되는 것보다 시장 후보가 되는 것에 더 무게를 둔다.

▲ 한나라당 부산시장 후보는 친박계 손에 달려 있다. 지난해 박근혜 전 대표(맨앞)의 부경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허남식 시장(앞 두 번째)과 친박 의원들
현 허남식 부산시장은 일찌감치 3선 도전에 나선 모양새고, 친박계의 서병수 의원도 도전 의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이나 부산시장 후보 당내 경선에서 패한, 부산 지역3선 의원 출신의 권철현 주일대사 역시 꿈을 접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세 병의 ‘유력후보’외에도 정의화∙허태열∙안경률 의원 등의 이름이 잠재 후보군으로 오르내린다. <시사IN>은 허남식 시장, 권철현 주일대사, 서병수 의원, 정의화 의원을 대상으로 “누가 한나라당 부산시장 후보로 적합한가?”라고 물었다. 현직인 허남식 시장이 25.0%의 지지를 얻어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지역 인지도가 높은 권철현 주일대사가 12.3%로 그 뒤를 이었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친박의 대표주자’라는 이유로 유력한 부산시장 후보로 꼽히는 서병수 의원은 정작 현지 유권자를 상대로는 4.7%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정의화 의원(5.6%)에게도 뒤지는 최하위다. 모름/무응답 비율은 52.4%로 높게 나왔다. 서 의원은 여섯 차례의 가상 대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 중 가장 지지율이 저조했다.

부산 지역 한나라당 의원 16명 중 친이계로 분류되는 의원은 정의화∙안경률∙김정훈 의원 정도다. 나머지 13명은 친박계이거나, 최소한 친박계와 가깝게 지내는 무당파로 분류된다. 부산시장 공천권을 사실상 친박계가 행사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허남식 시장 역시 박근혜 전 대표의 부산 방문을 수행하고, 박 전 대표 지지모임인 ‘포럼 부산비전’에 얼굴을 내미는 등, 지난해부터 부쩍 친박계와의 스킨십을 늘렸다. 여의도 및 현지 정치권에서 “결국 허남식 대 서병수 구도 아니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부산을 사실상 친박계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상득계인 권철현 주일대사가 파고들 틈이 커 보이지 않는 모양새다. 다만 친박계 주류라는 포지션을 활용할 심산이었던 서병수 의원은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낮은 지역 인지도가 앞으로의 행보에 걸리돌이 될 전망이다.

한편, “누가 민주당 예비후보로 적합한가?”라는 질문에는 역시 문재인 전 비서실장이 26.8.5 지지를 얻어 압도적으로 선두를 달린 가운데, 2006년 지자체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던 오거돈 한국해양대 총장이 12.5% 지지로 2위에 올랐다. 김정길 전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이 10.9%로 그 뒤를 이었고, 조경태 의원은 5.8%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지역 단위 선거에서도 전국적 지명도 보다도 현지 지명도가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름/무응답 비율은 44.0%였다. <시사IN 제94호, 7월 4일자 발행 인용보도, 천관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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