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후보…"정의로운 통합 시대 열겠다"…"숙명(宿命)이다"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 누적 득표율 57%로 대선 직행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일 제19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문 후보는 이날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민주당의 마지막 지역 순회 경선(수도권·강원·제주)에서 60.4%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전국 누적 득표율 57%(93만6419표)로 결선투표 없이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안희정 후보가 누적 득표율 21.5%(35만3631표)로 2위, 이재명 후보가 21.2%(34만7647표)로 3위를 차지했다. 최성 후보는 누적 득표율 0.3%(4943표)를 기록했다.

문 후보는 수락 연설에서 "저는 오늘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역사를 시작한다"며 "분열의 시대와 단호히 결별하고 정의로운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겠다"고 했다. 문 후보는 "이번 대선은 보수 대 진보의 대결이 아니다"며 "정의냐 불의냐의 선택이다. 상식이냐 몰상식이냐의 선택이다. 공정이냐 불공정이냐 선택이다"고 했다. 이어 "위대한 국민의 나라로 가야 한다. 제가 정치를 결심한 목표도 바로 그것"이라며 "대한민국 주류를 바꾸고 싶었다. 이제 권력의 주류는 시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깨끗해서 자랑스러운 대통령, 공정해서 믿음직한 대통령, 따뜻해서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안희정·이재명 후보는 전체 선거인단의 약 60%를 차지하는 이날 마지막 경선에서 문 후보의 과반 득표를 저지해 결선투표까지 간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당 주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사전 투표소 투표, ARS 전화 투표, 대의원 현장 투표, 재외국민 인터넷 투표 등으로 치러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은 일반 시민과 당원 등 총 214만4840명이 선거인단으로 참여해 그중 164만2640명이 투표하며 76.6%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문 후보가 이날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바른정당 유승민,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대선 구도가 확정됐다. 국민의당이 4일 경선 발표를 남겨두고 있지만 사실상 안철수 후보가 확실한 상태다. 문 후보는 4일 첫 일정으로 국립서울현충원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할 예정이다.

■ 문재인 후보가 걸어온 길

문재인(64)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2012년 대선 출마를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만든 '운명(運命)'이라고 했다. 2017년 대선 재수(再修)에 나선 그는 "이번엔 '숙명(宿命)'"이라고 했다.

문 후보는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 부모는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월남(越南)했다. 문 후보는 "부친은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한 분"이라고 했다.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막노동을 했다. 어머니는 문 후보를 업고 계란 행상을 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산으로 간 가족은 연탄 배달을 했다. 영도 신성성당의 구호물자로 끼니를 때웠다. 문 후보는 요즘도 노모(老母)와 이 성당을 찾는다. 결혼도 이곳에서 했다.

머리는 명석해 명문 경남중·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빈부 격차가 확연한 교내 분위기에서 세상의 불공평함을 접하고 반항심이 커졌다. 고교 시절 '노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친구에게 시험 답안지를 보여주고, 술·담배를 하다 정학을 네 번 당했다. 별명이 '문제아'로 불렸다. 폭력 교사에 반항해 해당 과목을 공부하지 않았다. 서울대 상대 입시에서 떨어졌다. 재수를 한 뒤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반독재 학생운동을 했다. 그는 "폭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존심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 4학년인 1975년 인혁당 사건 사형 집행 다음 날 유신 독재 화형식을 주도하다 구속돼 서대문구치소에 4개월간 수감됐다. 장남에게 실망한 아버지는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석방 뒤 문 후보는 강제 징집돼 특전사령부로 배치됐다. 군 생활은 체질에 맞았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최정예 요원으로 선발돼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투입됐다. 문 후보는 "학교에서는 벌 받기 바빴는데 군대 가서 상을 더 받았다"고 했다.

1978년 제대를 했지만 구속 전력으로 복학이 안 됐다. 취직도 못 했다. 낭인(浪人) 시절 부친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문 후보는 "감옥을 나왔는데 아버지는 꾸짖는 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문 후보는 회한(悔恨)으로 남은 아버지의 49재를 마치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갔다. 누우면 잠이 올까 봐 방에 물을 뿌려가며 공부했다. 1979년 1차에 합격하고 이듬해 2차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 시위에 나섰다가 또 체포됐다. 문 후보는 유치장 안에서 2차 합격 소식을 들었다. 경찰서장 허락하에 면회온 동창들과 유치장에서 '소주 축하 파티'를 열었다. 1981년 문 후보는 같은 대학 성악과 2년 후배 김정숙(63)씨와 7년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대학 축제에서 만난 김씨는 문 후보를 찾아 감옥·군대·대흥사로 면회를 갔다. 김씨는 "나를 자유롭게 해줄 것 같아서 재인씨와 결혼했다"고 했다. 문 후보는 1남 1녀를 뒀다. 사법연수원을 차석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으로 판사 임용은 안 됐다.

부산으로 내려온 문 후보는 198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사시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소개했다. 일곱 살 위였지만 문 후보는 첫 만남 뒤 "같은 과(科)라고 느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만들고 시국 사건을 맡았다. 1988년 노 전 대통령이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자 문 후보는 "뒷일은 내게 맡기고 정치권으로 가시라"고 했다.

'법무법인 부산'을 세우고 변호사 생활을 하던 문 후보는 2002년 대선에 출마한 노 전 대통령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지내며 임기 내내 노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이때 격무와 스트레스로 치아 10개가 빠졌다. 2009년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문 후보는 2011년 자서전 '운명'을 쓰고 현실 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2012년 4월 총선 때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됐다. 그해 12월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나서 야권 후보 역대 최대인 1469만표(득표율 48%)를 얻었지만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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