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 흥남철수작전, 부모 피난, 거제서 출생 특별히 강조

■ 아래 내용은 미국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재한 내용 

미국 워싱턴 앤드류스 기지에 내리자 말자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있는 해병대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장진호 전투(Battle of Chosin Reservoir)는 세계 3대 동계 전투로 알려진 사건으로 역사적으로는 물론이며 저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한국전쟁의 가장 처절했던 후퇴작전입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그 전투의 결과로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의 ‘크리스마스 기적’이 있었고 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저의 부모님이 매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도로 피난을 내려오셨고 그 거제도에서 제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로 가기 전, 예배당에서 참전용사의 후손들을 만났습니다. 흥남철수 작전에 참여했던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손자이신 퍼거슨 대령, 포니 대령의 손자이신 네드 포니 님을 만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장진호 전투에 직접 참여하셨던 스티븐 옴스테드 장군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정정한 모습의 장군께서 제 옷깃에 기념배지를 선물로 달아주셨습니다. ‘3일 동안 혹한에 눈보라가 쳐서 길을 찾지 못하 헤맸는데 어느 날 새벽 1시 쯤 눈이 그치고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옴스테드 장군의 말씀을 들으며 혹독했을 개마고원의 추위와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 옴스테드 장군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뱃지를 달아주고 있다.(사진: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게재 사진 인용)

흥남철수의 주역이신 현봉학 선생의 딸, 헬렌 현 여사와도 만났으며 메러더스 빅토리 호의 일등항해사였던 루니 제독은 서신을 주셨습니다. 또한 당시에 직접 촬여하신 메러더스 빅토리 호의 사진도 선물로 주셨는데 귀한 서신과 하나 뿐인 기록을 기꺼이 내어주신 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키를 잡았던 레너드 라루 선장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의 일이 모두 끝난 후, 라루 선장님은 베네딕토 회의 수사로 사셨습니다. 그 때 수도원에서 함께 지내셨던 친구분들도 만나 뵈었습니다. 라루 선장님은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가 되셨는데 이제 선장님을 성인으로 추전하는 절착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라루 선장님의 성인 추천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요청, 기꺼이 받겠습니다.

참으로 가슴 벅찬 감사와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흥남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올랐던 젊은 부부가 남쪽으로 내려가 새 삶을 찾고 그 아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이 곳에 왔습니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참배 연설에서도 언급했지만 한미동맹은 장진호 전투와 같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진 것입니다. 몇 장의 종이 위에 단지 서명으로 맺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한미동맹은 저의 삶이 그런 것처럼 양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미동맹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한미동맹은 더 위대하고 더 강한 동맹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둘러보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

■ 아래 연설문은 미국을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 헌화할 때 한 기념사 

존경하는 로버트 넬러 해병대 사령관님, 옴스테드 장군님을 비롯한 장진호전투 참전용사 여러분, 흥남철수작전 관계자와 유족 여러분, 특히 피난민 철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알몬드 장군님과 현봉학 박사님의 가족분들 모두 반갑습니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앞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니 감회가 깊습니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에 드디어 왔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첫 해외순방의 첫 일정을 이곳에서 시작하게 돼 더욱 뜻이 깊습니다.

67년 전인 1950년, 미 해병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들이 한국전쟁에서 치렀던 가장 영웅적인 전투가 장진호 전투였습니다. 장진호 용사들의 놀라운 투혼 덕분에 10만여명의 피난민을 구출한 흥남철수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난민 중에 저의 부모님도 계셨습니다. ‘피난민을 구출하라’는 알몬드 장군의 명령을 받은 고(故) 라루 선장은 단 한 명의 피난민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무기와 짐을 바다에 버렸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은 사진 설명에 "라루 제독님께서 직접 찍으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갑판 사진입니다. 어딘가에 저의 부모님도 계셨겠지요"라고 썼다.

무려 14,000명을 태우고 기뢰로 가득한 ‘죽음의 바다’를 건넌 자유와 인권의 항해는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를 떠나 12월 25일 남쪽 바다 거제도에 도착할 때까지 배 안에서 5명의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도주의 작전이었습니다.

2년 후, 저는 빅토리 호가 내려준 거제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고마움을 세상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존경과 감사라는 말로는 너무나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의 가족사와 개인사를 넘어서서, 저는 그 급박한 순간에 군인들만 철수하지 않고 그 많은 피난민들을 북한에서 탈출시켜준 미군의 인류애에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이 세계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인 이유입니다.

제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항해도중 12월 24일, 미군들이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사탕을 한 알씩 나눠줬다고 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비록 사탕 한 알이지만 그 참혹한 전쟁통에 그 많은 피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준 따뜻한 마음씨가 저는 늘 고마웠습니다.

존경하는 장진호 용사와 후손 여러분!

대한민국은 여러분과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존경의 기억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한미동맹은 그렇게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졌습니다. 몇 장의 종이 위에 서명으로 맺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또한 한미동맹은 저의 삶이 그런 것처럼 양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미동맹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한미동맹은 더 위대하고 더 강한 동맹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장진호 용사와 후손 여러분!

67년 전, 자유와 인권을 향한 빅토리 호의 항해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저 또한 기꺼이 그 길에 동참할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굳게 손잡고 가겠습니다. 위대한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북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함께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만,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 변호사님의 인터뷰를 봤습니다.‘죽기 전에 통일된 한반도를 꼭 보고 싶다’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은 저의 꿈이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이곳에 한 그루 산사나무를 심습니다. 산사나무는 별칭이 윈터 킹(Winter King)입니다.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영웅적인 투혼을 발휘한 장진호 전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나무처럼 한미동맹은 더욱 더 풍성한 나무로 성장할 것입니다. 통일된 한반도라는 크고 알찬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이제 생존해 계신 분이 50여 분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다시 한 번 장진호 참전용사와 흥남철수 관계자, 그리고 유족 여러분께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장진호 전투 기념비 앞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사진

■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1]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생존자가 몇 안 된다 하여 영어로 그들을 가리켜 "The Chosin Few"라 하였는데 그 말은 "The Chosen Few" (선택 받은 소수)를 의미하는 일종의 "pun (펀)", 하나의 동음이의적 익살이다.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2] 흥남 철수의 작전시작한 날은 바로 대한민국이 평양에서 철수한 날이었다. 또한 흥남 철수 작전이 바로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1945년~1993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건조된 무어-맥코맥사(Moore-McCormack Lines)의 화물선이다. 길이 455피트(약 138.7m). 7천600t. 배의 정원은 60명. '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은 북부 캐롤라이나의 작은 대학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배 이름 뒤에 '빅토리'라는 단어가 붙은 일련의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짐과 장비를 실어나르는 화물선으로 만들어졌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22일 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당시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모두 1만4천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명이 죽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같은 날 알몬드는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무기를 중공군에게 뺏기지 않도록 흥남부두를 폭파시켰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난 뒤 시애틀로 갔다가 베트남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수년간 워싱턴주 브레머턴(Bremerton, WA)에 정박해있었다. 1971년 퇴역했고, 1993년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이 배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되는 배 중의 하나이다. 미국 교통부(DOT)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했다. 미국에선 이 배의 철수 작전의 전말을 담은 <Ship of Miracles>(저자 Bill Gilbert, 출판사 Triumph Books)라는 책이 출판됐다. 이 책은 2003년 7월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 간), 2004년 7월 <마리너스의 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자운각 간)으로 번역돼 한국에서 출판됐다. 라루 선장은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모든 선원들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1958년)과 미국 정부의 '용감한 선박' 표창, '상선단 공훈 메달'(1960년)을 받았다. 2001년 라루 선장의 장례 미사에 우연히 참석했던 재미동포 기업가 안재철씨는 라루 선장의 삶에 크게 감화를 받고 이후 흥남철수 관련 <생명의 항해>라는 책을 펴냈다. 안씨는 철수 작전 당시 일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씨와 함께 기네스 기록 등재를 신청했고, 2004년 9월엔 기네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를 한 배로 기록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이 만들어졌다.

■ 흥남철수작전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출항 기준)부터 23일까지 흥남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작전.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흥남주변에 몰려든 10만 명의 북한주민들도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하였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평양을 포기하게 되자, 1950년 12월 4일 평양시의 전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38선 접경 및 그 이북 전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50여만 명에 달하는 이북 피난민동포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하여 많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했다. 중공군의 역습으로 가장 위급한 상태에 있던 유엔군은 육로와 동해해안 방면으로 신속하게 후퇴하였다. 따라서 유엔 해군은 서해에서의 철수보다는 흥남에서의 대규모 철수작전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50년 12월 당시 서부전선상으로 북진한 제8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 방면으로 북진한 미 제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되는 지형특성상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진호 전투 시 하갈우리에는 현지주민을 비롯하여 함흥 방면에서 올라온 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주변 계곡이나 동굴에 숨어 있다가 미군이 진주하자 운집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작전기지인 함흥, 흥남으로 천신만고 끝에 후퇴하였으며, 원산에 주둔해 있던 미 제3사단도 중공군이 남쪽의 퇴로를 막아 이곳으로 이동해 왔다. 이때 집결 병력은 10만 5천여 명이었다.

1950년 12월 9일 맥아더 원수의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고 곧 미합참의 철수를 승인함으로써 흥남철수작전이 개시되었다. 같은 해 12월 11일부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탑재되기 시작하여 같은 달 14일 선적이 완료되었으며, 같은 달 15일 흥남부두에서 출항하였다. 이후 축차적으로 유엔군 부대와 국군 제1군단이 12월 23일(해군 기준으로는 24일)까지 흥남철수를 완료하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6백만 톤이나 되는 무기와 장비를 수송해야 했기에 피난민 수송이 어렵다고 하였으나,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통역인 현봉학의 설득으로 마지막에는 남는 공간에 피난민 수송을 허락하였다. 피난민 승선이 허락되자 부두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LST 한 척에는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승선하였지만, 30만의 인파 중 마지막까지 배를 탄 피난민은 9만 1천여 명이었다. 피난민 승선으로 4백 톤의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백 60만 톤의 장비가 유기되었으며, 승선이 끝난 후 해군 함대와 폭격기가 집중사격을 가하여 폭파시켰다.

흥남철수작전은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함정으로 완전하게 철수시켰다. 그 과정에서 한국군 지휘관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남행을 결심한 피난민 9만여 명까지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항공기를 이용해 병력 3,600명과 차량 196대, 1,300톤의 물자를 철수시켰다.

흥남철수작전은 대규모적인 육해공 합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같은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해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 흥남철수 기념공원 조성사업

거제시는 장승포동 687번지 일원, 옛 장승포항 여객선터미널 2만1,314㎡ 부지에 흥남철수작전을 테마로 호국평화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40억원(국비 190억원, 도비 15억원, 시비 3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기념전시관, 공원, 상징조형물, 주차장 등을 오는 2021년까지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거제시는 1991년 해체된 메러더스 빅토리호 대신 거의 같은 모양 크기로 그 당시 함께 제작된 ‘레드오크 빅토리호’의 인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2015년 미국 리치먼드시를 방문했다.

올해 1월 장승포항 부지 사용 관련 협의를 해양수산부, 경상남도와 마쳤다. 올해 4월 19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심의위원회에서 ‘흥남철수기념공원 조성 사업’이 현충시설로 선정이 됐다.

거제시는 국가보훈처가 예산을 확보해 내년에 기본계획 용역 시행에 들어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 거제시 관광과 담당 공무원과 약식 전화 인터뷰

기자 : 흥남철수 기념공원 조성 사업 경우 올해 4월 19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심의위원회서 ‘선정’이 됐다고 했는데, 무엇으로 선정이 됐다는 것인가?

공무원 ; 현충시설로 선정이 된 것이다.

기자 : 현충시설로 선정이 됐다면 흥남철수 기념공원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는 말인가?

공무원 : 현충시설이 돼서 예산을 줄 수 있는 근거는 마련이 된 것이다. 예산을 바로 투입한다는 것은 아니고, 예산을 투입할 수 있는 근거는 마련했다.

기자 : 기념공원을 빨리 조성할려면 예산 확보를 위한 거제시 노력이 중요하겠는데?

공무원 : 보훈처의 의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보훈처에서 예산을 반영해서 국가사업으로 예산을 내려줘야 거제시도 움직일 수 있다.

기자 : 거제시가 흥남철수 기념 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재인 대통령이 인식하고, 국가보훈처에 조속한 사업 추진을 지시하면 기념 공원 조성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겠나.

공무원 : 예, 근거가 되니까 예산을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니까.

기자 : 레드오크 빅토리호 등을 인수해서 전시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결론이 났느냐.

공무원 : 레인 빅토리호나 레드오크 빅토리호를 미국에서 가지고 오는 것은 힘들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쪽에서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 : 여객선 터미널을 흥남철수 기념공원으로 조성할려면 각종 자료를 많이 수집해야 되겠네요.

공무원 : 자료 수집하고 메러더스 빅토리호 설계 도면이 확보가 돼 있기 때문에 모형 외형을 복원한다든지 할 예정이다. 국가보훈처와 지속적으로 조율을 하고 있다. 공감대가 다 형성돼 있다. 예산만 확보되면 바로 진행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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