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연구회 신종만

신라시대 축성되고 고려 중기 재 축조된 둔덕기성을 ‘폐왕성’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만연하다.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역사적 사실은 둔덕기성이 신라시대 만들어진 성은 맞지만, 국사 사적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시대 ‘경계의 난’의 직접적인 현장이라는 점이다.

경계의 난은 1170년(의종 24) 경인년(庚寅年)과 1173년(명종 3) 계사년(癸巳年) 2번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두 사건으로 고려의 수많은 문신들이 살육을 당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 사림이 겪었던 몇 번의 사화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문신들의 희생이 있었던 비극적인 역사다.

‘폐왕성’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일제의 역사 왜곡에서 비롯된 것으로 ‘폐왕성’이란 이칭에 대해 설명은 하되 이칭조차 붙여선 안 될 이름이다.

폐왕성은 1930년대 통영 군 지와 경남의 성지 등 일제강점기 그들이 처음 붙인 이름이다.

또 고려사 기록에서 유배와 폐위라는 표현 어디에도 없다. 추측이 아닌 정확한 한자 해석은 의종이 ‘쫓겨나다’는 표현이 아니라 ‘양위하다’라는 표현이 맞다. 오히려 폐위되다, 쫓겨나다 등의 표현 자체가 역사 왜곡인 셈이다.

금사와 송사에도 의종은 양위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고려조정도 의종이 병환으로 동생인 명종에게 양위했으므로 이를 인정해 달라며 사신을 보냈고 송과 금은 다음 왕위 서열인 태자가 있는데 동생이 양위했다는데 의심을 품었다.

따라서 의종의 거제 행과 관련된 기록은 강제로 양위당한 뒤 시해됐다는 표현이 맞다. 더구나 폐위된 왕에게 시호는 붙여지지 않는다. 고려시대 우왕 및 창왕의 경우가 그런데 고려는 황제국(외왕내제)을 칭하고 있었기 때문에 폐위된 왕에게는 조선시대 군(君) 보다 높은 왕(王)을 사용했다. 시호가 붙여진 의종은 폐위된 왕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개화기나 대한제국 시기(한국의 근대적인 교육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강점기)에 나온 초등대한역사 , 동국사략, 보통교과 동국역사, 대동청사, 국조사, 중고사(中古史), 조선역대사략 고려기(高麗紀), 조선역사 등에는 의종이 귀양을 갔다는 표현이나 정치가 문란했다는 표현이 없다.

의종의 실정으로 무신정권이 시작됐다는 표현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 무인(武人)의 발호 부분에 처음 등장한다.

“인종이 죽자 의종(毅宗) 【제18대】 이 등극했다. 왕은 품행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정치를 소홀히 하여, 나라의 세력이 점차 쇠약해졌다”

‘심상 소학 국사 보충교재’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초등학교용 국정 한국사 교과서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역사교육을 실시해 ‘일선 동조론’ 논리에 따라 역사교육을 시키고 이에 따른 국민의 복종과 희생의 정조(情操)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뒤를 이어 일제가 만든 <보통학교 국사>와 <초등 국사>도 내용을 함께하고 있다.

해방이 된 후 우리나라 교과서엔 일제의 잔해가 그대로 반영됐다. 총독부의 내용을 더해 만든 미군정기에 만든 교과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문교부령 제35호로 제정 공포돼 시행된 1954년 4월 20일부터 1963년 2월 15일까지 시행된 제 1차 교육과정기에서 무신란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의종(毅宗) 24년(1179)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을 수령으로 문신(文臣)을 몰아내고, 국왕을 바꾸는 등, 무인들이 활발히 활동함에 따라, 또 그들 상호 간의 항쟁이 심하여지니, 그 틈에 권신(權臣) 들은 모두 살해당하고, 지방은 혼란해졌다”

하지만 2차 교육과정(1963년 2월 - 1973년 1월)과 이후 5차 교육과정(1987년 7월 - 1992년 9월)까지 일제강점기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5․16과 12․12 군사쿠데타로 만든 정권 시절이다.

그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94년 대학 수학능력시험 시작된 제6차 교육과정(1992년 10월 - 1996년 12월)부터선 무신정권의 원인은 의종이 아니라 당시 ‘숭문 천무’의 고려사회제를 첫 번째 원인으로 꼽았다. 하지만 의종에 대한 책임이 모두 없어진 건 아니었다.

최근 새거제신문사에서 국사편찬위에 문의한 내용에선 ‘무신정변의 원인을 ‘의종의 실정’에 두는 입장은 주로 근대 이전의 전통사학에서 제기되었던 연구경향이며, 근대 역사학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1930년대 이후로는 고려의 전통적인 문신 우대 정책에 수반되는 무반에 대한 차별이 통설‘이라고 했다.

거제지역에서 편찬된 2002년 거제시지, 2011년 거제교육사에도 방영돼 의종의 피신, 피난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국사편찬위는 어떤 입장에서 기술하였는가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기록된 내용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내용 속에는 거짓이나 오류도 있을 수 있어 역사학자는 사료비판 과정에서 이러한 모든 경우를 고려하면서 해당 사료와 다른 기록과의 선후 관계, 불합리한 점 등을 비교 검토하여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기존 잘못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교과서로 배운 많은 사람들이 무신정변과 의종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고대사나 조선사를 전공하는 사학자들에 비해 고려사 전공 사학자들의 수가 드물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역사를 일방적인 방향으로만 바라보며, 자신들이 교과서를 통해 배운 내용을 토대로 한 지식만을 주장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미 사학계에선 무신정변의 원인을 의종의 실정 때문으로 보지 않는 것이 통설이라는 국사편찬위의 답변에도 ‘무신정변의 원흉, 폐왕 의종’을 운운하는 것은 ‘임나일본’과 ‘고려장’을 인정하는 것은 친일 식민사학을 받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의종은 역사서를 만들고 상정 예문을 편찬해 왕권의 강화와 국가의 안위를 꾀했고, 신령을 반포하고 서경을 정비해 당시 혼란했던 동북 정벌의 원대한 꿈을 키웠던 인물이었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우리는 깨우쳐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세우는 일은 미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고려촌 복원사업과 지역의 고려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경제적 논리가 아닌 우리 거제의 정체성을 바로 세운다는 점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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