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학 신장장애인 거제지부장, 신장장애인의 어려움 기고

신용학(42) 신장장애인경남협회 거제지부장은 신장 장애인으로 겪은 어려움과 체험의 글을 본사에 보내왔다.

1987년 경남 양산에 있는 작은 중소기업체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얼굴을 만져보니, 눈도 뜨지 못할 만큼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머리가 매우 아팠다. 온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회사에 출근 하자마자 조퇴를 했다. 양산 복지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뚜렷한 병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큰 병원으로 가봐야겠다 싶어 부산 메리놀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검사결과 양쪽 콩팥 기능이 75%가 마비되고, 25% 밖에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힘든 일을 하는 직장일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계속적인 육체노동은 남아있는 25% 콩팥기능도 마저 못쓰게 된다"고 했다.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양산 병원에서 한달간 치료 후에 고향인 거제로 내려왔다. 그 당시 대우병원이 갓 생기는 터라 계속적인 진료와 약물요법으로 치료를 받으면서 집에서 지냈다.

어머님께서 자식 걱정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다. 어머님께서는 동네 집집마다 다니면서, 좋다는 약은 다 마련하시어 저에게 먹이시곤 하셨다.

장남인 저 때문에 어머님께서 눈물로 지세웠던 나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이고 메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께서 45도 소주에 담가둔 5년 된 약이라면서 가지고 오셨다. "아주 귀하게 구했다"며 먹어보라고 하셨다.

▲ 신용학 신장장애인 거제지부장(사진은 지난 3월 8일 촬영한 것임)
어머님께 무슨 약인지 물어보아도 답은 안하셨다. 아침 점심 저녁을 세 번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술이라 그런지 혈압이 올라 밤 8시쯤 코피를 쏟고 말았다.

코피는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11시가 다 되도록 나왔다. 이렇게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마을에 있는 약국으로 달려가 혈압을 재보니 250 나왔다.

약사는 이대로 있으면 큰 일 나니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급히 대우병원 응급실에 갔다. 혈압은 그대로 내리지 않았다. 무조건 안정이 최고라면서 응급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였다. 그래도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새벽 2시쯤 코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만 기절을 했다. 눈을 떴는데 중환자실에서 수혈을 받고 있었다.

아침에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소견서를 써주면서 빨리 부산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기운없이 나와 어머니와 함게 부산으로 가기로 맘먹고 대우병원을 힘없이 나왔다.

그만 어머니께서 땅에 주저앉으시면서 울고 말았다. "어머니 왜 그렇게 우세요. 저 괜찮아요. 아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제가 어머님을 안심시킬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어머니와 부산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 담당 의사 선생님이 "신장이식밖에 길이 없다"고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어머니와 전 다시 대학병원을 나와 거제 집으로 돌아왔다. 신장 이식의 길은 찾지 못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머니가 귀하다고 구해오신 소주가 문제였다. 평소에도 신장기능이 저하되어 약한데 혈압이 높아있는 상태였다. 거기에다 소주를 하루 동안 먹었으니 혈압이 상승하여 코피를 쏟고 말았다. 급기야 대학병원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집에서 힘없이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또 다시 병이 악화되어 호흡이 곤란하고 소변도 잘 나오지 않았다.

축 늘어진 몸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이 따르고 결국 목에서 피를 토하고 위급한 상태에 이르게 됐다. 곧바로 마산 고려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생명이 위급한 상태라 지체없이 인공신장실이라고 쓰여져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사타구니쪽 동맥에 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장치를 하고 곧 바로 인공신장기로 3시간 정도 혈액 투석을 시작했다.

입원수속을 밟고 한달간 병원에 있었는데 2~3일 만에 다시 인공신장실로 내려가 같은 방법으로 혈액투석을 했다.

의사선생님께서 이제는 신장 콩팥기능이 전혀 없으니 평생동안 이렇게 피를 걸려주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 내 나이 스무 한 살이었다. 너무나 힘든 나날 속에 생과 삶의 기로에 서면서 42살인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다. 모든 걸 내 팔자니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달래면서 말이다.

혈액투석이란 피 속에 노폐물이 쌓여 폐 심장 등 온 몸 속에 축척되어, 인공신장기로 걸려주지 못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가족들의 힘든 생활도 저하나 때문에 겪어야 할 고통은 이루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제가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혈액투석 콩팥이식 아버지의 신장 한 쪽을 기증받아 4년 만에 거부 반응으로 다시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복막투석도 있는데 복막투석은 배에다가 약물을 넣고 2천CC 정도 되는 약물을 배속에 넣었다가 4시간 후에 다시 빼내고 다시 넣고 하루에 네 번은 규칙적으로 해야 되는 방법이다.

이런식으로 여러번 치료 방법을 병행하면서 지금까지 투병생활 해왔다. 대학병원에서 혈관 수술 등 크고 작은 십여차례 넘게 각종 수술을 했다. 그러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다.

어떨땐 대중사우나 시설이나 이용할려면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쑥스럽게 느길 때가 많았다.

지난 세월 돌이켜보면 함께 치료를 받던 동료 환우 친구 동생 형님 누나들 하나 둘 내 곁을 떠나 보내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외롭고 힘든 투병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서로 고통 받고 의지할 곳 없는 환우들과 함께 한 곳에 모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도 든다.
▲ 신용학 지부장은 신장장애인이지만 21년 동안 병마와 싸우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핸드폰 컬러링이 '희망의 노래'여서 기자의 가슴을 뭉클케 했다.
2006년 6월 1일 신장장애인 경남협회 거제시 지부를 창립했다. 환우들을 위한 복지기금조성, 영세 환우들을 위한 치료비 지원 사업, 재활사업, 생활고충상담, 장기환자에 대한 정신과치료 프로그램지원 등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걸음마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고 있다. 다달이 들어가는 집세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굳굳이 좌절하지 않고 생활해주는 우리 신장가족들을 보면서 앞으로 후원회가 생기고 복지기금이 조성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더 많은 신장 장애우들에게 용기를 심어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장장애우들은 일주일에 세 번 혈액 투석을 받아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아픈 주사바늘 꼽고 4시간 동안 인공신장기에 의지한 채 물이랑 음식도 양껏 먹지 못하면서 오직 "살아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자신을 추스르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소변도 한 방울도 볼 수 없으니 매일같이 힘든 나날들이다. 그나마 세월이 많이 흘려 어느 정도 의술이 발전하여 투석효율도 많이 좋아졌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시설과 투석으로 질좋은 생활의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신장장애 환우(患友)들이 행복해질 그때까지 거제지부는 환우들 곁에 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 신용학 거제시지부장의 승낙을 받아 핸드폰 번호를 남겨드립니다. 격려의 전화 한 통화라도 큰 힘이 될 듯 싶습니다. 신용학 지부장 : 017 855-2773 신장장애인경남협회 거제시지부 : 633-8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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