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년 맞은 신영복 교수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원전격인 '엽서'에 실려있는 편지 원문. 신영복 교수가 감옥에서 제수씨에게 보낸 편지 내용
▲ 왼쪽 '엽서'는 신영복 교수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원문이 그대로 실려있는 책 표지이고, 오른쪽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양장본 표지<왼쪽 '엽서'는 2000부 한정 인쇄>

아래 글은 한겨레신문이 2008년 8월 28일 25면에 보도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에 관한 글이다. 1968년부터 20년 20일의 감옥생활과 1988년 8월 15일 출소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취재 보도한 내용이다.  

40년 이어온 사색…"진보 구심체 꾸릴 때"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50만부 이상 팔린 ‘장기 베스트셀러’
‘청구회의 추억’ 따로 출간 기념행사
“절제가 오히려 더 깊은 공감 부른 듯”


“가끔 독자들을 만나 들은 얘긴데, 힘든 상황을 겪은 분들이 내 글에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일부에선 신영복의 이력에 비해 사색의 전투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했고 또 한켠에선 엄청난 전투성이 있다고도 했다. 여러 층위의 반응들이다. 대체로 인문학적 가치, 인간적 고뇌, 인간적인 삶과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그런 호응을 불렀다는 평이 많다.” 27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 책의 20년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한 차원 높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심도 있는 담론들의 등장은 이른바 ‘87년 체제’를 실감하게 만드는 하나의 징표였다.

봉함엽서를 채운 그의 글들은 검열을 받았고 상당수는 그 과정에서 불허당했다. 그 때문에 “검열보다 더 강도 높은 자기검열”을 통과해야 했는데, 일부에서 지적한 ‘전투성 부족’은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서신 발송 횟수는 징역 초기 4급일 때는 한 달에 한 번, 2급일 때는 네 번 등으로 제한돼 있었다.

▲ 신영복 교수가 직접 쓴 '여럿이함께'(본사 사무실에 걸려있는 액자 촬영)
“학교(경남 밀양 출신인 그는 숙명여대, 육군사관학교의 잘나가던 경제학 교수였다)에 있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 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번 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책에서 쉽게 읽히지 않는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그처럼 짧은 지면에 가능한 한 많은 내용을 압축하고 행간마저 글자 없는 의미공간으로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일 터다. “괴테도 얘기했듯이, 강조나 과장보다는 (압축에 따른 표현의) 절제가 오히려 깊이 있는 공감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돌베개 출판사가 이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돌을 기념해, <청구회의 추억>(1998년 증보판부터 수록)을 영역대조 단행본으로 따로 내면서 북콘서트를 여는 등 ‘20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청구회의 추억’은 지은이가 1969년 사형선고를 받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재생종이 휴지에 몰래 6명의 아이들과의 우정에 관해 쓴, 문학적 향기가 짙은 글이다.
▲ 신영복 교수의 '청구회 추억' 육필 원고
신 교수는 통일혁명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 “통혁당은 정식으로 결성되지도 않았다. 서울시당 준비모임이 꾸려져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나는 학생운동 차원에서 대학선배가 주도한 모임에 적극 참여했는데, 그 선배 삼촌이 북한에도 갔다 온 모양이었다. 당시 <청맥>이란 잡지에 진보적 소장학자들이 글을 많이 썼는데,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운동 차원이었다.”

재판 때 검사는 초등학교 꼬마 6명을 위해 지어준 노래가사 속의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의 ‘주먹 쥐고’조차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몰아세웠다.

20년간 아들의 출소를 기다리던 양친은 살아서 그 꿈을 이뤘으나 병중이던 어머니는 그의 출소 뒤 1년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7년을 더 살았다. 그들 소원대로 결혼도 지인들 주선으로 출소 뒤 바로 했다.

출소 뒤 다시 20년, ‘87년 체제’가 무너지고 ‘보수반동’의 시대가 재래했다. “20년 전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가 불완전하고 불철저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사회변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운동의 구심, 지도부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 진보적 정당들까지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를 키워 온 민주, 변혁 역량을 아우를 수 있는 탄탄한 구심체를 꾸리는 일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는 보수적인 ‘2008년 체제’가 오히려 그런 과제를 해결하는 데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 한겨레신문 2008년 8월 28일 25면 기사
그는 우리 사회를 ‘불철저한 민주화’ ‘뿌리 깊고 완고한 보수적 구조’ ‘국제금융자본의 진입과 수탈’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정치적 지배그룹의 교체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언론과 자본, 법조, 사회문화적 토대 등을 장악한 강력한 보수 권력집단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고 소외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사회 지배엘리트 재생산 구조가 절대적으로 미국 의존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미국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패권질서에 우리 사회가 올인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10년’을 얘기하며 미국에 올인하는 보수지배세력은 실은 “지난 10년간의 변화에 대한 감각, 촛불시위에서도 드러난 젊은이들의 새로운 감각과 문화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현 정권의 장래가 순탄하진 못할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하지만 한층 정교해지고 대중화한 현대 사회의 포섭기제, 특히 미디어나 이미지를 집권세력이 장악함으로써 젊은층의 정치적 각성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며, 변혁 가능성을 낙관하지 않았다.

<한겨레신문 2008. 8. 28. 25면 인용보도. 한승동 선임기자, 사진 이종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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