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립주체측에 자진철거 유도했지만, '가처분 신청' 맞대응 뜻 내비쳐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안에 세워진 김백일 동상이 철거쪽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철거까지는 순탄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백일 동상 건립 과정에서 문화재법을 위반해 경남도의 '원상복구' 명령이 4일 떨어졌다. 거제시 담당공무원이 지난주 흥남철수기념사업회를 방문해 자진 철거를 유도했지만 순순히 응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12일 박태문 거제시 관광과장은 "7일 동상을 세운 단체를 방문해 동상 자진 철거를 권유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과장은 또 "강제철거 행정대집행에 앞서 계고 단계에서 철거 명령 이 적법했는지에 대한 가처분신청이 들어올 것 같다"며 "결국 법의 판단에 따라 해결될 것 같다"고 했다.

김백일 동상은 5월 27일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세워졌지만, 김백일 장군의 한국전쟁 공적에 앞서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경력이 드러나 친일행적 논란에 휩싸였다.

▲ 5월 27일 김백일 장군 동상이 건립된 후 친일행적 논란이 불거져 철거쪽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철거까지는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그 이후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 성명서 발표, 옥영문 시의원 1인 시위, 시민단체 계란 투척 퍼포먼스, 7명의 거제시의원 1인 릴레이 시위, 거제시의회 동상 철거 결의문 채택, 동상건립 과정 문화재법 위반 '원상복구' 경남도 통지, 7명의 거제시의원으로 구성된 동상철거 대책위 가두서명 등이 일어났다.

앞으로 동상 철거 과정에서 또 한번 논란이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네이버 위키백과사전에 밝혀져 있는 '간도특설대'

■ 간도특설대

간도 특설부대(間島特設隊) 또는 간도특설대는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 · 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명 규모의 대대급 특수부대였다.

▲ 개요

간도 특설대는 당시, 간도에서 조선 독립군과 중국인이 연계한 반일-반만주국 투쟁(대표적인 조직은 중국 공산당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에 소속되었다.[1]

동북항일연군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 관헌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에서 1943년까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조직을 진압하는 부대의 특성상, 대부분의 조선사람으로부터 거부되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국에서 살고 있던 친일파 군인들 다수가 소속되어, 독립운동과 항일 항만주운동의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1] 역사학자 필립 조윁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일본군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활동했던 조선인 한국에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의하여 친일부역자로 분류하는데, 15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한 것이 조사되었다.  

▲ 활동

주요 토벌 대상은 한족과 조선인 그리고 양정우가 지휘자로 있는 동북항일연군이었다. 간도성은 오늘 날의 연변지역이며, 연변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연군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그들 중 생존한 이들은 해방 후 김일성을 지도자로로 북한 사회를 움직이는 집권층이 되었고, 되돌아간 특설부대원들은 한국 국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1939년 5월 특설부대는 일본수비대를 배합하여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림 속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체포를 하고 보니 산나물을 뜯는 부근 마을의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염천 대대장과 산천 중대장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서 불에 태워버렸다.

1939년 7월 1일 특설부대는 천보산 광산이 항일연군의 습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고, 도문 일본군 수비대와 협동 작전을 하여 천보산을 토벌했다. 교전 중 항일연군 전사 한 명이 희생되었는데 특설부대는 충혼비에 제를 지내기 위해 항일연군 전사자의 배를 가르고 간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그런데 그것을 메고 가던 민부가 허기를 달래려고 통조림인 줄로 알고 훔쳐서 먹다가 생고기인지라 버렸다고 한다.

1941년 겨울 특설부대의 3개 중대는 원부시 대대장의 지휘 아래 안도, 돈화, 화전 등 3개 현에 대한 토벌을 진행, 제2중대와 기포중대의 3명 대원이 변복한 항일군 2명을 체포하였다. 하나는 제1중대의 취사반에서 잡일을 하게 하고, 하나는 기포련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는데, 취사반에 있던 사람이 도망을 한 것을 도목구에서 다시 붙아다가 부대를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 시키고, 총부의 부관 옥량 중위가 군도로 머리를 베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1941년 1월 특설부대는 안도현 대전자에서 동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산림에서 항일연군 여전사 4명을 체포, 압송 도중 강간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였다.

1942년 8월 특설부대 제1중대는 변의대를 조직하여 차조구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중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 두 사람이 양민증이 없다는 구실로 형벌을 감행한 후 체포하였다.

교전 중 전사한 이들에게는 《16용사 기념비》를 세웠으며,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전사자 중 반장 오현상에게는 경훈장, 남일록(南日錄) 등 15명에게는 주국장을 발급하였고, 생존자 중 끝까지 저항했던 현학춘(玄鶴春)에게는 3급 무공장을 수여하였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관내방면 석갑진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36차례의 토벌을 수행하여 103명을 살해하였으며, 62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 일본 패망 후 한국에서의 인식

광복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등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그대로 국군지도부가 되었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 4·3 사건’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고, 한국 전쟁 때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백야전사령부를 창설하여 지리산빨치산을 토벌하고 32세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던 백선엽이 대표적이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운동을 대거 탄압하였으므로, 현재 알려진 간도특설대 소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의 일본군 대위 경력 논란으로 인해 일본군에 복무해도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 놓았다. 그러나 간도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하여 독립군 말살이라는 그 임무 때문에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되어 있다. 

▲ 부대가

1939년 12월 해산될 때까지 부대가로 불렀던 노래는 간도특설대의 정신을 잘 말해준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 조선인 군인

백선엽을 비롯한 150여명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의 장교로 복무를 했다. 이중 알려진 인물은 다음과 같다.

강재호
김찬규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춘근
박창암
마동악
백선엽
최남근
박정희 (만주국군관학교 입학, 일본군육관사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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