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시설관리공단 측…"단지 포로수용소유적공원 관리 차원에서"

[2신]포로수용소유적공원 김백일 동상이 20일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가 씌운 차양막과 쇠사슬을 걷어내고 비닐 천막으로 새롭게 가려졌다.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관리하는 거제시설관리공단측은 21일 오후 관광객들 편의 차원에서 차양막과 쇠사슬을 걷어내고 각목으로 사각 틀을 짠 후 비닐 천막으로 동상을 다시 씌웠다.

▲ 김백일 동상은 차양막과 쇠사슬에 묶인지 하룻만에 비닐 천막으로 교체됐다.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8월 휴가철 관광객이 많이 오는 시기를 앞두고 검은 차양막과 쇠사슬로 묶인 김백일 동상이 관광객들에게 나쁜 인상을 줄 우려가 있어 천막으로 김백일 동상을 덮었다”고 했다.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또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관리하는 측면에서 동상 철거쪽과 존치쪽 어느 입장을 들기도 어려운 입장이다”며 “임시적으로 동상 가림막 시설을 해놓는다”고 했다.

[1신]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안에 세워진 김백일 동상 철거를 놓고 극한 상황으로 치닫는 서곡이 울렸다.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이하 시민연대협)는 '친일파 김백일의 동상을 덮으면서'라는 보도자료를 내고 20일 오후 3시 김백일 동상을 검은 차양막으로 덮었다.

▲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는 20일 오후 3시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안에 세워진 김백일 동상을 검은 천으로 덮어씌웠다.

시민연대협은 "친일파의 동상을 거제시의 얼굴인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두고 볼 수 없어, 우선 동상 덮어씌우기로 했다"며 "8월 15일까지도 자진철거하지 않을 경우 (시민연대협에서) 직접 철거할 것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고 밝혔다.

연대협은 또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측은 명분없는 주장을 되풀이 하지 말고 본인들의 주장대로 정말 칭송하고 추앙해야 할 만한 인물이라면 본인들의 회관이나 건물에 모시기를 권고한다"고 했다.

시민연대협은 "흥남철수작전의 은인이라는 (김백일) 공적도 사실은 철수작전의 총 지휘관이었던 알몬드 소장의 문관이었던 현봉학 박사가 핵심역할을 수행하였기에 동상의 건립취지와 성격도 특정단체의 특정인물에 대한 미화작업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측은 ‘철거처분취소가처분’과 취소소송 등으로 맞대응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여 전 국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항일구국의 선봉에 섰던 거제시민들에 대한 도전의사를 명백히 표현하였다"며 8월 15일까지 동상 철거 수순에 나선다고 밝혔다.

시민연대협은 김백일 동상을 검은 차양막으로 덮은 후 쇠줄로 동여맸다. 그리고 '나는 일제의 앞잡이로서, 대한독립을 위해 무장투쟁하던 독립군 172명을 학살한 간도특설대의 장교였다. -김백일-'이라는 표시를 동상에 남겼다.

결국 김백일 동상은 5월 27일 건립 후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동상 건립측 자진 철거', '거제시 행정대집행 철거', '시민단체 강제 철거'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 '백일천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시민단체연대협 '친일파 김백일의 동상을 덮으면서' 보도자료 전문

지난 5월 27일에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포로수용소에서 동상을 건립하여 흥남철수작전의 영웅이라 추켜세웠던 김백일장군이, 사실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악랄한 친일파로서 항일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무장투쟁 하던 독립군의 전문토벌대인 간도특설대의 핵심 장교였으며, 더욱이 본 동상건립의 목적이었던 흥남철수작전의 은인이라는 공적도 사실은 철수작전의 총 지휘관이었던 알몬드 소장의 문관이었던 현봉학 박사의 인간관계가 본 민간인 철수동의의 핵심역할을 수행하였기에 본 동상의 건립취지와 성격도 특정단체의 특정인물에 대한 미화작업으로 밖에 볼 수 없어 우리 시민연대 일동은 끊임없이 철거를 주장하였다.

또한 그동안의 과정은 차치하고 행정절차로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세워졌던 친일파 김백일의 동상건립 과정에서 경남도의 문화재법상 문화재보호구역 심의위반 등을 이유로 거제시를 통해 철거명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 문제의 당사자인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측은 ‘철거처분취소가처분’과 취소소송 등으로 맞대응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여 전 국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항일구국의 선봉에 섰던 거제시민들에 대한 도전의사를 명백히 표현하였다.

이미 우리는 8월 15일을 한도로 당사자들이 직접 철거하지 않는다면 시민의 이름으로 직접 철거하겠다고 천명하였기에 지금의 논란 과정에도 불구하고 철거는 미루지만, 더 이상 친일파의 동상을 거제시의 얼굴인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두고 볼 수 없어, 우선 동상 덮어씌우기를 추진하며, 이후에 8월 15일까지도 자진철거하지 않을 경우 직접 철거할 것을 다시 한 번 천명하는 바이며,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측은 명분없는 주장을 되풀이 하지 말고 본인들의 주장대로 정말 칭송하고 추앙해야 할 만한 인물이라면 본인들의 회관이나 건물에 모시기를 권고하며 오늘 시민의 이름으로 김백일의 동상을 덮는다.

2011. 7. 20.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 일동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운동에 대한 성명서

6․25 전쟁의 영웅 그 중에서도 흥남철수작전과 관련하여 10여 만 명의 함경남북도 피난민을 무사히 거제도로 철수시킨 세계 전사에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우리 함경남북도민들의 푼돈을 모아 지난 5월 27일 거제도 흥남철수 기념공원에 그 동상을 건립하여 제막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많은 피난민을 철수시켜 정착시킨 그 고장에서 철거 등의 갖은 준동이 일고 있는데 대하여 우리들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이유인즉 과거 ‘간도특설대’에서 항일무장 세력을 토벌하였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에 이름이 올려졌기 때문이란 것이다.

분명히 따지고 넘어갈 일은 김백일 장군은 일본군이 아니라 만주국 장교였고, 항일무장세력이 아니라 일제 말기에 남만주일대에서 준동하던 중국 공산당(8로군) 및 김일성 일당의 만주국내 침투저지작전에 동원된 것 뿐이다.

견디다 못한 김일성 일당은 만주에서 연해주로 도주하였으며, 이들이 패전과 함께 소련의 비호로 북한을 지배하여 6․25 전쟁과 그 후에 갖은 악행을 일삼고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 도당인데 그래 그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무지한 소행은 지극히 이념적이고 편향된 견지에서 만들어진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됐다는 이유만으로 김백일 개인에 대한 죄목에 하등의 거증 없이 매도함은 너무나 맹목적이요 비논리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놀라고 어이없이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백일 장군은 6․25가 나기 직전에는 여순반란사건의 성공적인 진압과 6․25 발발 때는 초기 지연작전을 주도하였으며, 최후의 낙동강 방어전에서는 안강-기계지구 대첩을 거두어 북진에 발판을 마련하고, 38선을 최초로 돌파하여(10월 1일 국군의 날 제정) 공산치하의 북한동포를 구출하여 한국전의 영웅이 되었으며, 흥남철수작전 때는 세계전사에 그 유례가 없는 10만 여 명의 자유민을 구출한 김백일 장군의 행적에 비추어 보아 너무도 맹목적이요, 비 이성적인 삿대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묻노니, 그대들의 무지와 경거망동이 일천만 실향민을 실망시키고, 850만의 재향군인들을 분노케 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음을 아는가?

경고하노니 어리석은 굿판을 이제 집어치우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우를 즉시 집어치워라!

2011년 6월 22일

함북6․25전적기념사업회 회장 황현찬
함경북도 중앙도민회 회장 안철호
함경남도 중앙도민회 회장 홍성윤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회장 황덕호

네이버위키백과사전에 밝혀져 있는 '간도특설대' 관련 내용

■ 간도특설대

간도 특설부대(間島特設隊) 또는 간도특설대는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 · 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명 규모의 대대급 특수부대였다.

▲ 개요

간도 특설대는 당시, 간도에서 조선 독립군과 중국인이 연계한 반일-반만주국 투쟁(대표적인 조직은 중국 공산당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참의원을 지낸 친일파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에 소속되었다.[1]

동북항일연군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 관헌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에서 1943년까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조직을 진압하는 부대의 특성상, 대부분의 조선사람으로부터 거부되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국에서 살고 있던 친일파 군인들 다수가 소속되어, 독립운동과 항일 항만주운동의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1] 역사학자 필립 조윁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일본군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 그들이 통치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간도특설대에 장교로 활동했던 조선인 한국에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의하여 친일부역자로 분류하는데, 15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한 것이 조사되었다.

▲ 활동

주요 토벌 대상은 한족과 조선인 그리고 양정우가 지휘자로 있는 동북항일연군이었다. 간도성은 오늘 날의 연변지역이며, 연변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연군은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그들 중 생존한 이들은 해방 후 김일성을 지도자로로 북한 사회를 움직이는 집권층이 되었고, 되돌아간 특설부대원들은 한국 국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1939년 5월 특설부대는 일본수비대를 배합하여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림 속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체포를 하고 보니 산나물을 뜯는 부근 마을의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염천 대대장과 산천 중대장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서 불에 태워버렸다.

1939년 7월 1일 특설부대는 천보산 광산이 항일연군의 습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고, 도문 일본군 수비대와 협동 작전을 하여 천보산을 토벌했다. 교전 중 항일연군 전사 한 명이 희생되었는데 특설부대는 충혼비에 제를 지내기 위해 항일연군 전사자의 배를 가르고 간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그런데 그것을 메고 가던 민부가 허기를 달래려고 통조림인 줄로 알고 훔쳐서 먹다가 생고기인지라 버렸다고 한다.

1941년 겨울 특설부대의 3개 중대는 원부시 대대장의 지휘 아래 안도, 돈화, 화전 등 3개 현에 대한 토벌을 진행, 제2중대와 기포중대의 3명 대원이 변복한 항일군 2명을 체포하였다. 하나는 제1중대의 취사반에서 잡일을 하게 하고, 하나는 기포련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는데, 취사반에 있던 사람이 도망을 한 것을 도목구에서 다시 붙아다가 부대를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 시키고, 총부의 부관 옥량 중위가 군도로 머리를 베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1941년 1월 특설부대는 안도현 대전자에서 동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산림에서 항일연군 여전사 4명을 체포, 압송 도중 강간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였다.

1942년 8월 특설부대 제1중대는 변의대를 조직하여 차조구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중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 두 사람이 양민증이 없다는 구실로 형벌을 감행한 후 체포하였다.

교전 중 전사한 이들에게는 《16용사 기념비》를 세웠으며,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전사자 중 반장 오현상에게는 경훈장, 남일록(南日錄) 등 15명에게는 주국장을 발급하였고, 생존자 중 끝까지 저항했던 현학춘(玄鶴春)에게는 3급 무공장을 수여하였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관내방면 석갑진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36차례의 토벌을 수행하여 103명을 살해하였으며, 62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 일본 패망 후 한국에서의 인식

광복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등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그대로 국군지도부가 되었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 4·3 사건’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고, 한국 전쟁 때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백야전사령부를 창설하여 지리산빨치산을 토벌하고 32세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던 백선엽이 대표적이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운동을 대거 탄압하였으므로, 현재 알려진 간도특설대 소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의 일본군 대위 경력 논란으로 인해 일본군에 복무해도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 놓았다. 그러나 간도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하여 독립군 말살이라는 그 임무 때문에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되어 있다.

▲ 부대가

1939년 12월 해산될 때까지 부대가로 불렀던 노래는 간도특설대의 정신을 잘 말해준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 조선인 군인

백선엽을 비롯한 150여명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의 장교로 복무를 했다. 이중 알려진 인물은 다음과 같다.

강재호
김찬규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춘근
박창암
마동악
백선엽
최남근
박정희 (만주국군관학교 입학, 일본군육관사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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