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숙 외도보타니아 대표]"쉽게 얻은 기쁨은 빨리 사라진다"

▲ 최호숙 외도보타니아 대표이사
외도보타니아는 1995년 4월 15일 외도해상농원으로 문을 연 후 2007년 8월 3일 1천만명 관광객을 돌파했다. 지난해도 130만명이 방문했다. 오는 2015년 개장 20년을 맞아 2천만 관광객 금자탑을 쌓을 가능성이 높다.

최호숙(76ㆍ崔浩淑) 현 대표이사의 남편인 고 이창호 회장이 1969년 거제에 낚시하려 왔다가 풍랑을 만나 외도에 피신한 것이 인연이 돼, 1973년에 외도를 매입했다. 경기도 양주 태생인 최호숙 대표이사는 18년 동안의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마감하고 1974년부터 외도에 첫발을 디뎠지만 감귤농장 실패, 돼지사육 실패를 맛보았다.

▲ 지금의 외도보타니아 비너스 광장에 선 고 이창호 회장, 최호숙 대표이사의 젊었을 때 모습
1976년부터 관광농원 조성을 시작해 20년 째 접어드는 1995년에 외도해상농원을 개장해 처음으로 관광객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다. 고생도 익숙해지면 재미있다. 얼마나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삶이란 고생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어차피 인생은 고생하면서 사는 것이다. 치열한 삶의 과정을 살면서 어려운 고비를 넘겼을 때 희열을 느낀다. 자연에서 진실한 삶을 배운다. 태풍이 오면 자연이 태풍과 싸워줄 것이라 믿는다. 태풍이 왔다. 잠잠해진다. 자연에 감사한다. 포기하지 않고 했다는 것이 기적이다. 외도가 너무 좋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중요하다."

2007년 7월 19일 누적 관광객 1,000만명 돌파를 앞두고 최호숙 대표이사를 한번 취재한 적이 있다. 3일 토요일 외도를 방문해 다시 만나자,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났어도 기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290만 명의 국민이 메일이나 스마트폰으로 받아보는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소개된 글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2월 23일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최호숙 대표이사가 지은 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외도'의 한 구절이 실렸다. 스마트폰으로 고도원 아침편지를 직접 보여주자,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쉽게 얻은 기쁨은 빨리 사라진다. 하나님은 한 번도 쉽게 '이것이다. 여기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하고 보여주신 적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나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쉽게 얻은 것은 오래 남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얻은 기쁨은 빨리 사라지고, 힘겹게 얻은 것은 끝끝내 남아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최호숙 대표이사는 이에 대해 "기독교인이 아니겠어요.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면 그 언젠가는 된다는 것을. 내가 절벽까지 갔을 때 뭔가 보여주시더라.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렇고 또 일을 결정하는 것도 뭔가 성에 차지 않고 그러다가 끊없이 끊없이 그냥 가는데 어느 날 확신과 사람을 또 필요한 만나게 해주더라. 소원이 될려면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 내가 만날 수 없구나. 그 벼랑 끝이 어딘지 몰라서 계속 일을 진짜 매일 일을 할려고"

-장사도가 올해부터 개장을 해 1,2월에는 2만5천명이 방문했습니다. 외도가 1,2월 4만5천명이 방문한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적은 방문입니다.
"많이 왔네. 우리도 초창기는 한해 20만 30만 명이 왔거든. 첫 숟가락에는 아무래도 배부르지 않죠. 새로운 상품이니까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겠죠. 아직 거기 못가봤어요. 한번 가봐야 되지 않을까."

- 통영시는 장사도를 통해 외도에 버금가는 관광객을 유치할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외도는 장사도와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어떻게 여는 것이 중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대중 마음을 읽어서 안착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 방파제 공사는 아직 시작을 안했죠.
"허가가 났다는데. 우리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관광객이 1300만명 왔는데, 아직까지 안전 시설이 없었어요. 다른 방파제와 다르게 그것 자체가 볼거리가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는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요. 설계하는 사람이 해주는 것도 썩 마음에 안들어요. 대중들이 뭘 원하는지 알잖아요. 대중들은 세련되고 그런 것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마음 속에서 편안한 그런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항상 내가 촌스러움도 경쟁력이다. 사실은 근사한 것 같지만 실은 촌스러운 게 우리 근본이다. 내가 좋다는 것을 뽑아놓고, 경쟁을 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최고다 하는 것이 나오거든요. 눈으로 환상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방파제는 기본적인 것은 해주지만 우리가 또 해야 한다."

외도보타니아는 2세 경영 체제에 들어선 느낌이다. 아들은 부사장을 맡고 있으며, 사위는 전무를 맡고 있다. 최호숙 대표이사는 가족 경영에 대해 "고 이창호 회장과 가족 경영을 통해서 오늘의 외도를 만들었다. 가족 경영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 의사 결정이 빠르다. 싸워가면서도 일을 추진할 수 있다"고 했다.

- 아들과 사위가 움직이고 있잖아요.
"아들은 아들대로 자기 방식으로 하는거고. 우리는 또 현대에 살지만 옛것이 편하하거든요. 그래서 뭐 하나 하는 것도 내 마음하고 다르더라고요."

외도는 아직까지 전기와 수도가 들어가지 않고 있다. 5대의 발전기 자가발전을 위해 한 해 사용하는 기름만 수백 드럼이다. 물은 빗물과 우물을 사용한다. 빗물은 식물에 주고, 우물은 식수로 사용한다. 물이 모자라면 육지에 물을 사가지고 간다.

거제시는 통영시 소속인 장사도에 거제시 예산 1억2천만원을 들여 지하수를 판 후 식수 및 용수 관로를 연결해줬다. 최호숙 대표이사에게 장사도는 전기와 수도가 거제서 들어간다고 하자 "그래요" 놀라는 표정이었다.

- 외도의 큰 숙원 사업인 방파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있는데, 전기와 수도는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더 큰 발전기를 쓰면 소음도 나고, 그래서 내가 확장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조용한 섬으로 서정적인 섬으로 그대로 남자 그러는데. 젊은 사람은 용맹이 안그렇잖아요. 무대를 좀 넓히고 싶고 있는 것이잖아요. 나는 그런 주장을 하고 아들은 외도 동섬에도 연결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죠."

- 외도 동섬을 연결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스터디를 좀 해봤어요. 해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놓은 후 흉물이 되면 곤란하잖아요. 요즘에는 하도 다리도 많이 놓고 다리가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흔해지면 가치가 없다 이거야. 흔하지 않는 다리를 놓아도 놓고, 쓰릴 있는 다리를 놓아야 되겠는데 그래서 그런 것도 생각해봤다. 투명다리 것을 해서 젊은 사람이 가보고. 참 경치가 좋아요. 우리가 1시간 반밖에 못쓰잖아요. 시간이 문제더라고요. 저것을 따로 운영을 할려면 또 다른 그러니까 선택을 해서 갈수는 있는데 시간 문제가 보통이 아니고. 거기 경치가 정말 좋거든요. 큰 섬에는 그런 경치가 없고 거기 있어요. 공연장 같은 것을 해서 1년에 몇 번. 그 안에 8천평이 있어요."

- 1세대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연을 개척하면서 고난을 넘어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들이 넘겨받았을 때는 잘 하겠나? 그런 우려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죠. 장점이면서 단점이죠. 나는 여기서 순수하게 그냥 아버지하고 내가 늙어갔으니까 끝이잖아. 어떤 애는 교육을 받아서 서울로 가는데 교육을 받아서 시골로 왔잖아요. 자기가 좋다는 것보다 운명이 그렇게 됐잖아요. 아버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남들은. 저놈의 새끼들은 수지맞았다. 이렇게 생각해요. 어떤 손님들이 와서 '이 집 자식은 참 좋겠다' 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왜요? 여기도 어려운 점이 많아요! 우리 자식들은 이런 부모를 둬서 지금은 좋아보이지만, 여기서 태풍 처서 1주일씩 닷새씩 못나가서 그 심정을 생각해보셨는지. 자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어릴 때 엄마 아버지가 여기에 미쳐서 저희들 돌보지도 않고, 늙어서는 자기들 자의반 타의반으로 여기 와서 또 해야되고. 피해자죠. 그렇잖아요."

외도보타니아는 2003년 큰 시련을 겪었다. 1934생인 고 이창호 회장이 그해 3월 1일 갑자기 작고했다. 2003년 9월 12일 저녁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외도도 매미 태풍 피해를 크게 입었다. 대형 파도가 외도 섬 절반까지 날아왔으며, 태풍이 지나간 후 부러진 나무 등을 치우는데만 40명 직원이 1개월 넘게 걸려다.

"태풍오면 뻔한 거니까 자꾸만 직원들이 서울 올라가라고 그러더라고. 그때 영감도 죽고 정신적으로 힘들었죠. 공항에 내려서 오페라 명성왕후를 보려 갔죠. 민비가 막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니까 가슴이 후련하더라니까." (핸드폰 벨이 울렸다. 호주머니에서 꺼내는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 외도보타니아 개발 당시 사진 모음
-2007년 인터뷰를 할 때 제2외도를 거제도 안에 한번 만들어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별다른 진척이 없습니다?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면 인기가 있어야 하죠. 재작년의 생각 그때 만해도 이집트 문화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다 재벌들이 이집트 문화를 가지고 시설을 많이 하고 있잖아요. 뭔가를 육지에 하나 해놓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그래도 내 생각에는 꿈을 간직하면 이뤄진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항상 지금도 여러 곳에 컨텍을 해보죠. 내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고 난 후 아름답게 보이고 멋있게 보이고 그런 것이 문제다. 지금은 해놓는 것이 많잖아요.

-통영시는 올해 봄부터 장사도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것 같습니다. 외도와 경쟁을 벌이자는 측면도 있습니다.
"홍보를 잘하는 것 같아요. 중앙언론에도 자주 나더라고요. 장사도가 문제가 아니라. 박람회 하는 여수로 많이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 여수를 많이 가는데, 오히려 외국 관광객 중국 관광객이 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요즘 외도에도 중국 관광객이 많이 오죠
"예 많이 와요. 한국사람들과 얼굴은 비슷해서 잘 구별은 안되는데 보면 얘기를 하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많이 오더라고요. 중국 사람이 참 좋아해요. 중국 사람은 이상하게 서기장 그런 사람들 꼭 거제도 여길 데리고 오더라고요. 서울에서도 와요. 왜냐하면 흉내 내기가 좋잖아. 크지 않아도 그렇게 하니까 되더라. 요즘에도 북경에서도 오고, 공무원들이 와요. 크지도 않고, 돈 많이 들것 같지도 않고 하니까.

-내도 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개발 자문 받으려 한 번씩 옵니까.
"처음에는 오더니만 요즘은 안오던데. 내도도 유명한 미술관 같은 거, 학교가 있잖아요. 시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결국 개인들이 인생을 바쳐야 돼. 그래야 명품이 된다고. 5년, 10년 안에 뭐 이뤄지는 것이 없거든요. 잘하든 잘못하든 계속 있어야 하는데. 요즘에 좀 철학이 있고 사명감이 있는 사람을 업자가 그런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 문제다. 그림은 근사하게 그려가지고 아무리 똑같이 집을 지어도 예술성이 들어간 사람하고 보통사람하고는 다르잖아요. 소질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난 그게 지도자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 지난 3일 토요일, 날씨가 싸늘한데도 외도 방문객은 줄을 이었다.
- 최호숙 대표이사는 김혁규 도지사와 인연을 소개했다.
"그 전에 경남도를 몇 번 다녔다. 포구문화를 바꿉시다. 섬도 좋지만 우리 포구 문화에 문화를 좀 바꿔봅시다. 그거는 큰 돈 들지 않고 칠하고 간판이나 가로등이나 이런 것을 좀 정리해주고 하나의 작은 어촌 마을을 멋있게 만들어봅시다. 김혁규 지사가 외도 와서 보고 외도는 이렇게 잘 해놓았는데, 경상남도는 아이디어 좀 달라. 모델을 구조라로 했다. 구조라가 마을도 크고 양쪽으로 바다가 있잖아요. 거기다가 문화적인 자그마한 것을 하면 배도 타고 물놀이도 하고 수영도 하고 외도도 구경하고. 와현이나 구조라가 가깝고 디자인을 해서 이걸로 해주시오. 운영은 우리가 안내센터가 있으면서 뭔가 할 수 있는 뭐를 해보겠다. 대여섯번 가고 했었어요. 김혁규 지사 가버리니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통영에 그림 그려놓았다고 여기도 그려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희소성만 없어져. 차라리 순진한 시골마을로 그냥 두면 좋은데 또 그림을 그려가지고, 모든 도시가 또 그렇게 가잖아요. 그거는 좀 안타깝더라고요."

- 섬을 개척한 분은 고 이창호 회장, 최호숙 대표이사, 외도 출신 강수일 고문 세 사람입니다.
"강수일 고문은 연세가 68세인데, 영감보다 12년 젊으니까. 지세포에 살면서 왔다갔다한다. 그런 사람은 없어요. 변하지 않고.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헌신하니까."

외도에서 태어나서 평생 외도를 지키고 있는 강수일 고문의 딸인 강정화 씨는 한택식물원 이사로 우리나라 식물계에서는 권위자다.

▲ 외도해상농원으로 개발을 시작한 외도의 초창기 모습
- 2006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외도’ 책을 출간하셨는데, 또 책을 내실 생각은 없으신지
"지금 준비하고 있어요. 베스트셀러는 안되겠지만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아서 거의 촬영은 끝냈다. 죽기 전에 무얼 남겨야 될 것 같고. 자서전은 아니고 조경의 기본적인 것 내가 왜 이런 비전문인이 왜 이렇게 했는가. 예를 들어서 내 고향의 시골 강촌에 고개 넘어 길 구상하면서 내가 외도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었다."

1시간 30분 동안 인터뷰를 하고 녹음기를 껐다. 최호숙 대표는 마지막으로 수첩에 적으라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꿈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꿈을 접는 날이 죽는 날이다. 살았다는 것은 꿈꾸는 것이다. 육체는 나이 들어도 정신은 아직도 젊으니까 살아있다. 다행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밖으로 나오면서 최호숙 대표이사는 빨깐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포즈를 취했다. 마음은 아직도 젊다는 것을 실감했다.

최호숙 대표이사는 2003년 남편 이창호 회장이 작고했을 때, 추모시비에 글을 남겼다.

“임께서는 가파른 외도에 땀을 쏟아 거름이 되게 하시었고, 애정을 심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지게 하시었으며, 거칠은 숨결을 바람에 섞으시며 풀잎에도 꽃잎에도 기도하셨습니다.”

▲ 최호숙 대표이사가 기거하는 집안 거실 모습. 멀리 보이는 섬이 해금강이다. 겨울연가의 마지막 촬영지다.
▲ 자연채광이 집 안으로 들어오도록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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