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양득 마미앤미 어학원 원장
▲ 황양득 마미앤미 어학원 원장

미국 유학 때 일이다.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 7시간 정도 신문 배달 후 집에 돌아오면 꼬박 운전한 거리는 100마일(mile), 킬로(km)로 환산을 하면 160킬로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매주 1,000킬로 정도를 달렸다.

봉제공장(옷감절단)에서의 일감이 줄어들고 토요일 출장뷔페(Catering) 일들이 안정치가 못하다 보니 다른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신문 배달이었다.

교회에서 사찰 집사라 불리며 했던 교회 청소는 귀국하는 달까지 이어 온 주업이었다.

2003년 봄이었다. 오렌지카운티(Orange County) 주변의 한인 가정에 한국일보와 중앙일보가 배달되었고 막 한겨레 신문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상황이었다.

신문은 한국에서 보내온 파일에 미주판까지 프린터가 되어 지면이 제법 많았다.

부수(한국일보)는 100부를 넘지 못했다. 가든그로브(Garden Grove)의 마트 주차장에서 간혹 광고 전단까지 넣어서 110여 부 정도를 챙겨 먼저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로 향했다.

새벽녘의 달빛과 별빛 그리고 가로등을 벗 삼아 한인 가정을 찾아서 비가 오는 날 마트 입구에서 우산 비닐 커버를 입히듯 신문을 비닐 주머니에 넣어서 차 안에서 왼손으로 현관문 앞으로 멀리 던져야 했다.

가끔 스프링클러 근처로 날아가면 차에서 내려 다시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고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차에서 내릴 일은 2층 아파트 발코니로 던져 넣어야 할 때나 요양병원에 계신 한인 어르신들에게 2~3부를 들고 관리실로 가면 꼭 필자를 맞이하는 고령의 애독자를 만날 때였다.

파운틴 벨리(Fountain Valley)에 있는 현대자동차와 연관된 설계 사무실에는 3~4부를 들고 사무실 안 책상 위에다 놓고 왔었다. 그렇게 밤에만 오고 가는 것이 익숙했었기 때문에 지금도 거기가 어디였는지 잘 모르겠다.

한 달 치 받는 급여는 1,000불이 되질 못했다. 이 금액에서 기름값으로 250~300불 정도를 제하고 엔진오일이나 기타 차량 관리 수리비로 100-150 정도를 빼야 했다.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500불 남짓이었다.

이일을 꼬박 3개월을 했는데 지역영업소 소장의 말을 빌리자면 이 두 구역을 합쳐서 3일 이상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두 곳 중 한 지역은 늘 자신이 담당했었는데 필자가 3달이나 해주어서 고맙다고 오전 수업 때문에 그만두는 날 차 한 잔을 사 주었다. 알고 보니 3사단 백골부대의 상사 출신이었다.

웨스트민스터는 월남 패망 후 미국으로 망명한 보트 피플(Boat People)중 다수가 정착한 도시였고 파운틴 밸리도 막 한인들이 조금씩 살기 시작한 곳이었다. 한인들이 밀집해 있는 플러튼이나, 가든그로브, 어바인 등은 신문 배달 업계에서는 먼저 자리가 잡힌 프리미엄이 붙은 텃새의 상징이었다.

학교를 벗어나 노동의 대가로 급여를 받을 수 없는 유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운밥 찬밥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캘리포니아 최저 시급(약 7불)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고 노동의 강도나 여건이 사실 최악이었다. 시작 2-3주 동안은 오전 9:30분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운전 중에 졸기도 많이 했고 그 느낌은 야간 행군이 아침까지 이어지는 피로와 눈이 부신 햇살로 운전이 순탄치 않았다. 그 덕분인지 지금도 가끔은 야간에 서울 거제를 쉼 없이 운전하고 간다.

신문 배달을 하는 3개월간 집 앞에 버려진 소형 TV, 라디오, 쿨러(아이스박스) 등을 트렁크를 연 채 고속국도(freeway)를 달리기도 했다. 하루는 마호가니 목재의 사각 케이스에 다리가 달린 40인치 정도의 브라운관 tv를 트렁크에 싣고 왔으나 집에서 전원을 연결해 보니 먹통이었다.

그 후 허리 통증으로 두 달 동안 버리지도 못했다. 야간에 같은 처지의 배달원을 만나면 반가운 인사와 얼마를 받는지 물어보곤 했었다. 한국일보보다는 중앙일보가 대우가 좀 나았다. 그리고 LA Times를 배달하는 베트남 배달원은 정식으로 일을 할 수 있기에 최저 시급 이상의 급여와 복지 혜택이 있었다. 월남 국수(Pho)와 월남 샌드위치(Banh Mi)가 웨스트민스터 지역뿐 아니라 남쪽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퍼져 제법 미국인과 이민자들에게도 잘 알려줘 있었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로 많은 한국인이 미국으로 이민과 유학을 떠나 손쉬운 LA 카운티 지역을 피해서 오렌지카운티로도 정착했다. 김치 및 불고기, 설렁탕 같은 메뉴가 이미 소개되었고 2000년 전후로 한국식 치킨이 점진적으로 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었다. 한국의 노래방이 자주 눈에 들어오는 시기였기도 했다. 한국식 슈퍼마켓도 빨리빨리 계산하는 한인 캐시어의 기민한 손놀림을 무기로 미 본토인들의 대형 매장 점유율을 조금씩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비록 가격에서 대형 매장이 우위에 있지만 한국 군대의 신속정확 문화가 미국 시장에서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한편 태국의 인기 음식인 밀크티 같은 Thai Tea가 선풍을 일으키고 중국의 차오면과 볶음밥 포장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의 이민 역사는 미국이 남북 전쟁 후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중국과 인도인들을 값싼 노동계약으로 미 본토로 데려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이 미 횡단 철도건설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고 금문교(Golden Gate) 건설에 단순 노동자의 역할을 도맡아서 했다. 120여 년 전 한인 노동자 86명도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떠나 가정을 꾸리고 뿌리를 내려 이민 1세대가 되었다.

이제 우리가 과거 150여 년 전 미국이 겪었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현상을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목소리와 얼굴 색깔이 변하고 있다.

양대 삼성과 한화 조선은 노동력 확보를 위한 자구책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모집하고 있다. 언젠가 그들도 거제에서 무서운 자생력으로 뿌리를 내리고 터전을 잡을 것이다. 2, 3세들의 성장과 함께 단단한 지역 사회의 울타리를 만들기도 할 것이다.

다양한 음식과 이국적 전통, 문화 그리고 종교도 소개할 것이고 값싼 노동력을 경쟁으로 경제적 지역 발전에 기여도 할 것이다. 그만큼 경쟁력을 잃는 한인들이 늘어나고 다양한 문화적 전파는 또 우리 전통과 미풍양속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정부나 지자체는 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강도 높은 교육과 평가 시스템으로 더욱 엄격한 이민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이해 못할 미국의 대통령 선거도 그 바탕에는 이민정책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시간은 무지(無知)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잔인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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