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이사장, 개인 경쟁력 '필승카드'…진보·보수 안티도 없어

또 한 명의 거제 출신 대통령을 보게 될까?
거제면 명진 출신인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에 대한 관련 기사가 연일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부산일보는 3일 ‘‘대망론' 끊이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문재인 이사장에 대한 기사를 게재했다. 옮겨 싣는다.<편집자 주>
▲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
문재인(58)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2일 자신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예전의 생각과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1일 "답변하기 난감하다"는 자신의 발언으로 출마설이 나오자 다시 쐐기를 박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고사만 하는 문 이사장에 대해 야권 내에서 '대망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짚어볼 만하다.

일부 야권인사들은 문 이사장을 '필승 카드'라고 단언한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개인 경쟁력에서, 또 하나는 정치역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개인 경쟁력은 익히 알려졌다. 신뢰·절제 같은 단어가 어색치 않은 품성과 더불어 공수부대 제대, 사법연수원 차석졸업, 인권변호사 활동 등 경력에서도 부족함을 찾기가 어렵다. 또 참여정부 내 요직을 거치며 정책에 대한 이해와 추진력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 중요한 것은 현 정치지형상 문 이사장의 경쟁력이 더욱 돋보인다는 것이다.

야권은 내년 대선을 역대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치를 가능성이 크다. 이미 경남·강원·충청의 도지사를 배출했고, 수도권 기초단체장 상당수를 접수했다. 이에 더해 내년 총선에서도 여소야대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야권에 딱 하나 부족한 것이 바로 경쟁력 있는 대선후보다. 최근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치고 나가고 있지만, '박근혜 대세론'을 깨기는 아직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를 극복할 야권 대선주자는 호남의 지지는 물론 경남·충청·강원지사들이 받았던 표를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하며, 수도권 지식인층의 호감을 사면서 영남에서 전패를 면할 수 있는 인물이 돼야 한다는 반응들이다.

이들 조건들을 대입해보면 문 이사장이 딱 '답'이라는 것이다. 진보·보수를 불문하고 '안티'가 없는 것도 장점으로 여겨진다.

물론 현실 정치인으로서 대중의 평가와 검증을 받지 못한 점, 대선후보의 '관문'인 국회의원이나 장관을 지내지 못한 점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어쨌든 문 이사장의 이런 '적합성' 때문에 그의 말대로 시간이 갈수록 안팎의 출마 압박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 거제인 문재인(文在寅)
거제면 명진 출신, 사법연수원 차석 수료하고도 시위전력으로 변호사로
 
2009년 05월 25일 (월) 09:39:21 김철문 기자 kcm@gjn.kr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운명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봉하마을이 내려다보이며 어릴적 꿈을 키웠던 ‘부엉이 바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뒤따르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문재인(文在寅·56)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과 23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에 앞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는 문재인 전 비서실장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 마을 뒷산에서 뛰어내려 23일 오전 9시 30분 서거하셨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한 사람도 문재인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문재인 전 실장이 거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 23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발표하기에 앞서 만감이 교차하는 듯 위를 바라보고 있는 문재인 전 실장
문 실장은 거제면 명진 출신으로 경남고를 나와 4년 장학생으로 경희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강삼재 전 한나라당 의원이 총학생회장이던 1975년 총학생회 간부로서 대규모 시위를 주도해 구속된 뒤 공수부대에 강제징집 당했다.

1980년 복학해 제22회 사법시험을 준비해 2차까지 합격했으나, 5·18의 혼란기에 다시 계엄사에 구금이 돼 3차 면접시험을 치를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가 조영식 경희대 이사장이 신원보증을 서는 등 우여곡절 끝에 사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학생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고, 82년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동업자’로서 변호사 사무실을 공동운영하게 되었으며, 1983년 문을 연 '법무법인 부산' 대표 변호사를 맡았다.

문 실장은 “노 변호사와 만났을 때 첫눈에 뜻이 통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의기투합했으며, 부산 신접살림도 노 당선자가 살던 부산 광안리 삼익아파트 단지 내의 전셋집에서 시작했다.

문 실장은 이보다 앞서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으면서 이후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수임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부림사건'이란 부산의 학림 사건이란 의미에서 '부림'이란 명칭이 붙여졌으며, 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부산지역 민주인사들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정부 전복집단으로 매도돼 총 22명이 구속된 5공화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 23일 오전 11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문재인 전 실장
문 실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산에서 대표적인 재야변호사로 이름을 떨쳤으며,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경남민변 대표,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청와대에 민정수석비서관을 청와대에 함께 들어간 후 2004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그만둘 때까지 근무했다.

휴직도 잠시 3월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휴양차 떠난 외국 여행을 접고 급거 귀국, ‘대통령 탄핵안 변론’을 직접 맡았다.

2004년 4월부터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을 맡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근에서 보좌했다.

문 전 실장은 2005년 1월부터 다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을 자리를 옮겨 2006년 5월까지 근무한 후 잠시 쉴틈도 없이 2007년 3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종료와 함께 청와대를 나왔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인 봉하마을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문 전 실장


주간조선 올해 4월 27일자 ‘노무현 패밀리 어떻게 돼가나’라는 기사에서 ‘문재인 전 비서실장, 봉하마을 오가며 여전히 '대외 창구'역’이라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동지인 문재인(56) 변호사는 ‘박연차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검찰 수사에 대비해 노 전 대통령에게 법률적 조언을 하고 있고 노 전 대통령의 입장을 외부에 알리는 언론 창구로도 나서고 있다. 최근 권양숙 여사가 부산지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동행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에서 민정수석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그는 퇴임 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해 왔다. 작년에 재단 ‘봉하’ 설립 사업 등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부산에서 봉하마을 인근의 경남 양산으로 이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석에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문 실장과 우정이 두터웠다는 후문이다.

문 실장은 이제 친구이면서 동지로, 대통령으로 뜻을 같이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슴에 묻었다. 문재인의 ‘인(寅)’은 같은 위치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同僚) 인(寅)'으로도 해석되는 것이 숙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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