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도에 묻혀있는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가치는 없애고 칠천량 해전공원에만 한정

거제시는 19일 칠천량 해전공원 기공식을 가졌다. '역사의 발전은 과거의 부족한 점을 되돌아 봄에서 시작된다'는 논리를 들이대며, 1597년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에 대패한 '칠천량 해전'을 추모하는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 기공식 장면
본지는 지난해 4월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사업이 시의회에 원안 가결될 때 '거제시와 거제시의원은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는 글을 통해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래 관련 기사 참조>

첫번째 문제점은 이번에 칠천량 해전 공원이 들어서는 하청면 연구리 산 85-4번지 일원은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곳과 상관 없는 곳이다고 했다.

▲ 칠천량 해전공원 사업개요

칠천량 해전 공원 조성 용역보고서에도 칠천량 해전이 벌어진 곳은 '칠천도 어온리 물안마을과 맞은 편의 (장목면) 송진포, (하청면) 실전 사이의 해협이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의 '승첩계본'에도 1592년 6월 7일 장목면 율포 해전에 승리한 후 온천량(지금의 칠천량)이 있는 장목면 송진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더라도 하청면 칠천도 어온마을 앞과 장목면 송진포 사이가 칠천량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이번에 조성되는 칠천량 해전공원이 조성되는 하청면 연구리 옥계마을의 조성 지역은 칠천량 해전과의 역사적 관련성 상징성이 풍부한 곳이 아니라 '거북선 찾기 사업의 거북선 탐사지역'이기 때문에 칠천량 해전공원을 조성한다고 용역보고서에 밝히고 있다.

옥포대첩 기념공원을 옥포대첩의 승첩지인 옥포만이 보이는 곳이 아닌 다른 제3의 장소에 공원을 조성한 것과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설상 칠천량 해전 공원은 제3의 장소에 건립되었다 치더라도, 칠천량 해전 공원 조성의 두번째 문제점은 칠천도가 가진 역사적 가치를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에 한정시켜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칠천량 해전 공원 조성에 앞서 칠천도에 묻혀있는 역사적 가치를 온전하게 복원한 후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역사적 시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보다 5년이 지난 1597년의 역사적 사건이다. 칠천도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부터 1594년까지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의 전가를 올리는 전초기지였다는 사실(史實)이 역사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592년 (율포 해전에 승리한 후) 초저녁에 거제 온천량(칠천량)의 송진포에 도착하여 밤을 지냈다', '1592년 7월 8일 '한산대첩'에서 승리한 후 안골포해전을 치르기 전인 7월 9일 온천도(칠천도)에서 밤을 지냈다.', '1593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세찬 바람으로 칠천도에 그대로 머물렀다.'는 등 칠천도의 지명과 그 인근 지명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칠천도와 그 주변지역은 1592년 5월부터 합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견내량해전(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웅포해전, 당항포해전, 제1차 장문포해전, 영등포해전, 1594년 10월 제2차 장문포해전까지 전초기지였다는 사실은 역사에 생생히 살아있다.

칠천도는 이처럼 무진장한 역사를 간직한 곳인데, 칠천도를 칠천량해전에 한정시켜 역사적 가치를 폄하시키는 저의가 무엇인 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같은 일은 3,5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추진하는 경남도의 '이순신 프로젝트'가 이순신 장군의 역사를 온전하게 복원시키는 진정성을 가진 프로젝트가 아닌 '정치적 행위'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는 거제시는 덩달아 부화뇌동하고 있으며, 칠천량 해전공원 조성예산 85억원에 칠천도를 팔아먹는 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공식까지 하면서 시작된 칠천량 해전 공원 조성 사업은 어찌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생각있는 시장, 공무원, 시의원일 것 같으면 칠천도의 역사적 가치를 다시 찾아야 한다.

칠천도의 역사적 가치를 찾기 위해 전문기관에 용역을 의뢰하는 예산 편성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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