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무장세력 탄압한 '간도특설대' 악랄성 속속 밝혀져
옥영문 시의원이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를 요청하는 '1인 시위'를 3일 째 하고 있지만, 거제시는 김백일 장군 동상에 대해 묵묵부답이다.
옥 의원은 9일 오전 10시부터 1인 시위를 시작해 지난 주 10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1인 시위를 계속했으며, 11, 12일 주말에는 각종 행사 참석으로 1인 시위를 잠시 중단했다.
13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1인 시위를 벌이다가 10시부터 시의회 회의 회의에 들어갔다. 옥 의원은 "동상이 철거될 때까지 1인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네이버 위키 백과사전에는 "간도 특설대(間島特設隊)는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ㆍ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무장조직이다"고 밝히고 있다.
위키백과사전에는 "간도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하며 독립군 말살이라는 그 임무 때문에 대위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고 추가로 기술하고 있다.
김백일 장군 소개란에는 "일제 강점기에 펑톈에 있던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하고 1940년부터 만주군에서 장교으로 복무했다.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하였는데, 방원철에 따르면 김백일은 송석하 다음으로 이 특설 부대의 창설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이었다. 만주군 상위로 태평양 전쟁에 종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서보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고 밝히고 있다.
백선엽(해방 후 육참총장·합참의장·교통부장관 역임), 김백일(해방 후 지리산전투사령관 역임), 신현준(해방 후 초대 해병대사령관 역임), 김석범(해방 후 2대 해병대사령관 역임) 등이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아래는 간도특설대와 관련된 <미디어오늘>, <세계일보>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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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06.08.08 (화) 16:24, 최종수정 2008.01.18 (금) 17:01 기사 >
일제 고관·軍간부로 호사… 독립군 토벌도
백선엽·신현준 등은 항일투사 잡던 간도특설대 출신
“내가 15살 때니까 1942년쯤일 거다. 우리 학교에 윤씨 성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하루는 ‘누나가 나카지마 중위라는 사람과 지린(吉林)신사에서 결혼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친구들과 구경하러 갔는데 만주국 황제 푸이의 동생 푸제가 온다고 해서 신사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저 멀리서 구경했는데 참, 대단했다. ‘조선놈 중 별놈이 다 있구나’ 싶더라.”
중국 옌벤대 박창욱 명예교수의 기억이다. 박 교수의 기억에 등장하는 나카지마 중위는 바로 해방 후 국무총리, 국회의장에까지 오른 정일권이다. 그의 창씨명은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權)이었다. 정일권은 1944년 만주국 룽징(龍井) 헌병사령부 사령(대위)에 오를 만큼 당시 만주의 조선인 중에서는 ‘엄청나게’ 출세한 인물이었다.
“안투(安圖) 명월구 우리 앞집에 이용길이라는 친구가 살았는데, 그 애 아버지가 간도특설대 통역관이었지. 용길이와 친했는데, 집에 놀러가면 집이 장판에다 뭐 번들번들하지. 신을 신어도 걔는 가죽구두 신었어. 우리는 신 신기도 바쁜(어려운) 때지. 그때는 특설부대가 뭘 하는지도 잘 몰랐는데, 용길이 아버지가 들어오면 왠지 무서워서 달아났어.” 안투 명월구에서 만난 김학렬(69)씨는 간도특설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용길이네는 해방되자마자 남한으로 갔다”고 했다.
당시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상당수 조선인들은 여러 친일 단체에 들어가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군에 입대해 침략전쟁에 참여했다. 단체는 간도협조회, 훈춘상조회, 훈춘정신대 등 다양했는데, 특히 간도특설대와 신선대는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는 조선인 부대로 조선인 사회에서 악명 높았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따르는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하네.”
취재팀이 입수한 중국 안투문사자료에 나와 있는 간도특설대가이다. 가사만 봐도 간도특설대의 성격은 분명하다. 대화혼이란 일본혼, 즉 일본 민족정신을 말한다. 이들의 행위는 해방 후 여러 조사 자료와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1941년 겨울 변계산 지대에서 토벌하다 항일전사 2명을 포로한 놈들(간도특설대원)은 명월구 공동묘지로 그들을 끌고 가서 전체 대원을 집합시킨 다음 군도로 목을 자르고 시체 옆에서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1944년 5월 어느 하루 아기하 중대장놈이 부대를 거느리고 사가장자 마을을 습격하였다. 놈들은 녀자는 만나는 족족 강간하고 좋은 물건은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는 간도특설대의 악행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안투문사자료는 “사람들은 특설부대를 둘째놈 군대라고 증오하여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둘째놈 군대는 일본놈보다 더 악독한 짓을 하였는데, 일본놈이 하는 나쁜 짓을 하였거니와 일본놈이 감히 하지 못하는 나쁜 짓도 하였다고 한다. 특설부대 력사를 펼쳐보면 확실히 그러하였다. 말 그대로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범하였다”(49쪽)고 기록했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에 따르면 간도성장 이범익의 제안으로 1938년 9월15일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그해 12월부터 1943년 말까지 간도 지역에서 조선인 항일무장세력을, 1944년 초부터 해방 직후까지는 르허성(熱河省)에서 중국 팔로군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1, 2기는 지원제, 3기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했으며 대대장(소령) 중대장(대위)까지만 일본인이고 그 외는 조선인이었다. 백선엽(해방 후 육참총장·합참의장·교통부장관 역임), 김백일(〃지리산전투사령관〃), 신현준(〃초대 해병대사령관〃), 김석범(〃2대 해병대사령관〃) 등이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박정희도 간도특설대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검증되지 않았으며 논란이 법정 싸움으로 번진 상태다.
신선대는 백두산 포수들을 모아 구성한 부대였다. 백두산을 근거지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김일성 부대를 토벌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신선대 대장 김일로 역시 꽤 악명이 높았던 것 같다. 박 교수는 “허룽(和龍)현에서 김일로라고 하면 다들 치를 떨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6·25 때 ‘남한으로 도망간 친일파를 잡기 위해’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한 조선인이 많았다는 것이다. 박 교수 자신도 인민해방군에 참여했는데, 그는 “당시 사람들이 ‘정일권, 김석범, 김일로 잡으러 가자’는 말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그 시절 그들의 이 같은 행적에 대해 “먹고살기 위해서”라거나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는 변명과 이해의 말들이 적잖다. 이 같은 자위와 변명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일제 침략전쟁과 정책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그 대가로 나름대로의 권세를 누렸다는 사실이다.
특별취재팀=류순열·김태훈 기자